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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편법상속', 포괄주의 상속세법이 아니라 형사처벌이 해법이다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믿기 어렵겠지만 이 땅의 재벌들은 살아서건 죽어서건 2세, 3세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법이 없다. 상속증여세가 따라붙는 재산의 직접 대물림 방식은 이들 가문에서는 미개했던 시절의 옛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10대 재벌총수 및 식솔들의 상속증여세 납부실적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그렇다면 재벌 2세, 3세들이 부모 생존시에 각각 제 이름으로 된 수천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재벌가문의 특별한 유전인자에서 해답을 찾아내고 어떤 이들은 재벌가문에 전승된 연금술과 절세법에서 해답을 찾기도 하지만, 나는 그룹총수와 계열사 사장들의 배임행위에 해답이 있다고 단언한다. 또한 재벌 2세, 3세 명의의 막대한 재산에 대해 '편법으로 형성된 건 사실이지만 불법으로 모은 것은 아니라'고 강변해온 정부당국과 달리 나는 이들의 핵심재산은 거의 모든 경우 배임범죄의 결과로 조성된 불법장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다행히 노무현시대의 개막과 함께 정부당국도 재벌가문의 편법상속 - 보다 정확하게는, 재벌기업의 배임증여 - 관행에 쐐기를 박을 각오를 다지는 모습이다. 국세청은 이미 재벌가의 주식보유 변동상황 및 관련세금 납세실태를 직권조사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하고 정권인수위에도 공식보고를 마친 상태다. 지금까지 프라이버시 보호 기타 터무니없는 이유를 붙여 현황파악조차 미뤄오던 국세청은 이로써 포괄주의 입법에 필요한 탄탄한 입법자료를 손에 넣게 될 것이고 언론은 재벌가들의 무세(無稅) 상속실적에 놀란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며 융단폭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반면 재벌연합 전경련은 '과거에는 다 그랬다'는 식의 관행 참작론으로 긴급진화에 나서면서 '새 시대' 동참을 명분 삼아 포괄주의 입법에 찬성론을 펴게 될 것이다.  

향후의 사태진전을 이렇듯 낙관하는 나로서는 국세청의 직권조사 및 포괄주의 입법추진에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조세정의 실현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로  보기 때문에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국세청이 지금까지 딴청을 부리며 직무를 유기해온 그간의 사정과 책임을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묻지 않을 용의마저 있다. 하지만 포괄주의 법개정이 이뤄져도 재벌그룹 계열사간 부당지원행위 및 총수가족의 기업재산 가로채기에 대한 억제효과는 매우 미미할 것이다. 열거주의에서 포괄주의로의 세제전환은 첨단기법이 동원된 우회증여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세금을 물리자는 데 그 취지가 있을 뿐 그 이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포괄주의 전환목적을 총수가족과 재벌기업 간의 증여성 우회거래 근절에서 찾는 지배적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노당선자 측의 정책책임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사실은 노당선자 측도 예컨대 삼성그룹 이재용씨 문제의 법적 본질을 첨단기법을 동원한 무세 상속, 곧 탈세문제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들과 기본관점을 공유한다. 과거 정부와 다른 점은 열거주의의 한계와 폐해에 대한 보완의지가 강하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괄주의 입법추진이다. 법조문에 구체적으로 열거된 증여성 거래에 대해서만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는 열거주의 법제 아래서는 나날이 발전하는 첨단 우회증여기법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는 게 불가능하다. 무딘 입법형식과 더딘 입법속도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뛰는 당국에 나는 재벌'일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도 삼성비서실이 치고 나간 자리를 뒤늦게 법조문으로 채우는 식의 뒷북치기가 되풀이됐다. 포괄주의 도입은 열거주의 법제에 고유한 규제지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물론 포괄주의가 도입되면 우회증여의 수혜자에게 돌아갈 실질적 혜택이 증여세액만큼 줄어들기 때문에 우회증여의 유인이 약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편법증여 억제효과가 기대되는 곳은 부모자식 기타 개인간이지, 재벌그룹 내부가 아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컨대 어떤 재벌기업과 총수아들 간에 실질적으로 100억 원의 실질증여 효과가 발생하는 불공정 자산매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가정해 보자. 총수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최고세율(40%)의 증여세를 내더라도 무려 60억 원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에 넣는 셈이다. 아버지 휘하의 계열사가 아닌 다른 데서 이렇게 손쉽게 한밑천 마련할 기회를 얻을 가능성은 현실 세계에서 전무하기 때문에, 이런 눈먼 기회가 남아있는 이상 아무리 세율이 높더라도 덤벼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포괄주의 입법 아래서도 재벌 2세, 3세들의 회사재산 도둑질은 그대로 계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종전에 비해 증여세를 내는 비율이 높아지긴 할 것이다. 하지만 도둑질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 소득세를 낸다고 해서 도둑질이 정당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볼 때 문제의 핵심은 재벌 2, 3세들의 탈세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벌 2, 3세들한테만 열려있는 눈먼 기회의 존재에 있는 게 분명하다. 이 눈먼 기회는 재벌그룹의 총수전횡체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를 억제하기 위해 지금까지 사외이사 도입, 기업공시 강화, 대표소송 요건 완화, 적발시 과징금 부과 등을 중심으로 제도적으로 대처해 왔다. 이와 같은  회사법적, 공정거래법적 접근방식은 대체로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긴 하지만 뿌리를 내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흠이다. 보다 강력하고 즉각적인 시정효과를 원한다면 검찰권  행사를 따라갈 게 없다. 물론 검찰권을 행사하려면 눈먼 기회의 존재에 범죄혐의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인간의 증여성 거래와 기업/개인간의 증여성 거래는 법적인 평가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난다. 일례로 아버지가 아들/딸에게 토지재산을 국세청 몰래 물려줄 목적으로 명목상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고 치자.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경우에는 불법적 요소가 증여세를 피해갈 의도 외에는 없기 때문에 발각시 세금 추징으로 불법적 요소가 해소된다. 그러나 회사법인의 경영진이 자신의 가족 기타 특수관계자에게 회사재산을 헐값에 넘기는 우회 증여행위에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이 추가된다. 이 경우 회사를 대표해서 우회증여를 집행한 경영진에게는 회사재산을 경제적 합리성 없이 헐값에 처분할 정당한 권한이 애당초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리법인의 경영진이 증여성 거래를 할 경우에는 공모한 수혜자로부터 증여세를 추징해도 여전히 경영진의 배임범죄가 남는다. 요컨대 총수가족에 대한 회사재산/가치/기회 실질증여는 형법적으로 그룹총수의 배임교사 및 관련계열사의 배임행위가 없이는 불가능한 범죄행위다.  

이처럼 재벌 2세, 3세에 대한 '편법상속' 및 '부당지원' 문제의 불법적 본질이 수혜자의 탈세에 있는 게 아니라 총수를 위시한 계열사 경영진들의 배임범죄에 있는 게 분명한 이상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국세청보다 먼저 검찰이 나서야 옳다. 나는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제안한다. 기업가치가 수조원에 달하는 삼성에버랜드의 62.5% 주식지분을 단돈 96억 원을 받고 재용씨에게 넘겨주기로 결의한 에버랜드 이사진(이건희 회장과 계열사 사장들)이 형법상의 배임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니면 이사로서 충실의무를 다한 것인지를 놓고, 누구든지 나하고 TV 토론을 해서 ARS 투표에 붙여보자. 내가 지면 지구를 떠날 준비가 돼 있다.

그렇다. 삼성그룹을 위시한 우리나라 재벌들의 연금술은 고전적인 배임범죄에 바탕한 기업재산 도둑질에 다름 아니다. 삼성 이재용씨 측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대로 봤다. 그렇기 때문에 남몰래 숨어서 진행했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크고 꼬리가 길어서 그만 중간에 들통이 났다. 주변의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찬탄과 탄식에 비해 규탄과 비난의 정도가 약했다. 그래서 계속 진행했고 결국 다 이뤘다. 이젠 모두 끝난 일이다.' 과연 그럴까? 이건 삼성측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나는 경제정의와 법치주의의 이름으로 삼성그룹의 배임증여를 처벌하고 3세 세습을 장사지낼 것을 요구하는 범국민적 촛불시위가 '국민이 만족할 때까지'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날마다 꿈꾼다. 검찰은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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