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한국어

토론 마당

로그인 후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한 게시판입니다.
이 게시판은 RSS와 엮인글이 가능합니다.
이 곳의 글은 최근에 변경된 순서로 정렬됩니다.
* 광고성 글은 바로 삭제되며,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설립취지에 어긋나는 글은 삭제 또는 다른 게시판으로 이동될 수 있습니다.
* 관리자에게 글을 쓸 때, 옵션의 "비밀"을 선택하시면 관리자만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 글을 쓰실 때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주소지 등)이 유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주십시오
조회 수 : 8153
2003.05.24 (09:45:36)
윗 글에 대하여 통일연구원의 전현준 위원이 노무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반론을 제기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제 뜻을 밝혔거든요. 오늘 자 경향신문 기고입니다.

윗 글에 대한 보충입니다.

마침 리영희 선생이 노무현 무식하다고 얘기한 것과 맞물려, 좀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의 통찰력과 지혜를 당부했는데, 그것이 비슷한 맥락이 되어 버렸습니다.

전현준 위원의 기고문도 참고로 뒤에 붙였습니다.
----------------------------------------------------------------
[기고] 한미동맹이 北을 압박해서야


통일연구원 전현준 선임연구위원이 22일자 기고를 통하여 필자의 시론에 관심을 표명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필자의 생각을 다시 밝히고자 한다. ‘현실을 직시하자’는 충고는 소중하며, ‘실용적 대미외교’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귀결이 단지 북한을 적대시하는 한·미 동맹의 강화라면 그것은 재고해보아야 한다. 한·미 동맹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한·미 동맹인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한·미 동맹이 약화되어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조장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한·미 동맹이 북한을 지나치게 위협하여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한·미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례없이 강하게 표출했다. ‘추가적 조치’를 명시했고 남북교류의 제한까지 시사했다. 그러나 미국의 ‘호전성’에 대한 북한의 의구심은 해소시켜주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미국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평화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그 우의란 무엇인가? 친구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미국의 강경책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그와 아울러 “북한은 자신들이 오히려 위협받고 있다고 하니, 그것은 괜한 오해이며 한·미 동맹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재차 천명하자”고 제안할 수는 없었을까? 이는 미국의 대의명분에도 맞지 않는가? 금년 초 ‘티콕’의 공동성명처럼 이미 선례도 있다. 그리하여 북한에 ‘명예롭게’ 핵무장을 해제할 수 있는 퇴로를 열어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우리의 목소리를 잊어서는 안되는 까닭은 한반도의 파국은 우리에겐 생존 자체가 걸린 문제이지만, 미국에는 기꺼이 감수할 수도 있는 희생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미국이 특별히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한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언제나 최선을 다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안이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그저 미국에게 맡기는 것은 상책이 못된다.


또 한가지. 미국에 가서 미국을 찬양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외교상의 예의도 그렇고 또 미국의 덕목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우리 경제를 위하여 특별히 신경썼다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하여 그렇게 신랄히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북한을 욕하면 미국인들이 듣기에는 일단 좋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신뢰를 높이는 데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북한의 교섭태도가 불성실하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면 모르지만 북한 체제 자체를, 그것도 미국에 가서 부정해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경우에 맞지 않다.


그것은 결국 북한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미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켜준다는 점에서 큰 문제이다. 현재 미국 정부 내에서는 협상이냐 제재냐를 둘러싸고 강온파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진행중이며, 북·미·중 3자회담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나서서 미 강경파의 손을 들어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북한과 대화를 하자는 것은 북한 체제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한반도의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고 한반도문제의 연착륙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물론 노대통령도 그 점은 분명히 했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행동을 하였으니 안타깝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최선을 다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는 미흡했다. 평화번영정책은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새시대의 희망을 안고 출범한 노무현 정부도 성공해야 한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통찰력과 지혜이다. 아니 그 지지세력의 각성이다.


〈정태욱 영남대 교수(법학)〉

최종 편집: 2003년 05월 23일 18:31:00

-------------------------------------------------------------

[기고]對美외교와 현실 직시

정태욱 교수의 5월19일자 시론을 잘 읽었다. 기본적으로 한·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평화는 요원하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도 직시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운위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반론을 펴고자 한다.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통일관과 대미관 때문이었다. 그것은 김대중 정부의 포용정책 계승과 대미 호혜·평등관계 설정이다. 그러나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노대통령은 포용정책의 수정과 일방주의적 대미관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노대통령 지지자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특히 미국을 ‘극찬’하는 파격적인 행보는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지지자들은 ‘굴욕 외교’로, 반대자들은 ‘실리 외교’로 평가하였다. 과연 어떤 평가가 맞는 것일까?


평가를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기준은 당연히 노대통령의 행보가 우리 민족의 생존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작용했느냐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노대통령이 한민족의 생존을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만은 확실하다. 미국으로부터 일단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혹자는 미국이 언제 전쟁을 한다고 했느냐고 핀잔할지 모르나 미국의 대북공격 옵션은 아직까지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은 9·11 테러사건 이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라크 침공에서 보듯이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은 목표가 정해지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돌진한다. 현재 미국의 목표는 당연히 자신들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적’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 수단은 물론 무력공격까지 포함한다. 도덕이나 자비는 과감히 배제된다.


이라크전 이후 북한이 목표가 될 것이라는 예측은 옳다. 미국은 ‘악의 축’인 북한을 ‘부시의 이름으로’ 응징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했을 때를 상상해보라.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 한국전쟁 이후 ‘깡’으로만 살아온 국가이다. 공격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겁쟁이가 아니다. 미국의 대북공격은 필연적으로 전면전을 수반할 것이다.


혹자는 공격 직전 북한의 모든 재래식 무기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보복공격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무기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어떤 수를 쓰든 미국의 대북공격은 말려야 한다. 그 방법은 미국과 대화가 되는 ‘절친한’ 친구가 되는 길밖에 없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친구 입장을 이해해주고, 양보해야 한다. 더구나 한때 절친했다가 삐친 친구와의 관계회복을 위해서는 더 많은 양보가 필요하다.


노대통령은 미국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죽음보다 더 값진 민족 자존심,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지지자, 피눈물나는 돈으로 산 남북관계를 버렸다. 물론 정교수의 주장처럼 이번 노대통령의 행동으로 미국의 대북공격 옵션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앞으로 어떤 더 나쁜 사태가 노대통령을 기다릴는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로서 그는 최선을 다했다.


‘바보’ 노무현의 선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지했던 자들이 먼저 열린 마음으로 그를 감싸주어야 한다. 그를 비난하기보다는 미국 없이는, 그리고 미국을 거역해서는 한시도 살 수 없는 구조를 탓해야 한다. 그 구조는 우리 모두가 만든 것이다. 이스라엘은 300여년간의 고난을 통해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지만, 우리 사회에 미국과 등지고 ‘고난의 행군’을 할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 의문이다. 이상과 현실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전현준/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최종 편집: 2003년 05월 21일 19:13:08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