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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6604
2001.06.29 (15:31:08)
「여호와의 증인」들은 왜, 언제부터 병역을 거부했는가 

3년 동안 代替봉사를 시키자
1600명의 청년들이 양심의 자유를 지킨다면서 감옥에서 3년을 복역하고 있는데…

白 浩 正 미국 메릴랜드대학 물리학 교수
1944년 출생. 경기고,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 대학 물리학 박사. 스탠퍼드 대학 교환교수. 저온 물리 기술을 사용한 중력 법칙에 대한 정밀 실험과 중력파 탐지 연구. NASA 인공위성 연구팀 근무.


이상적인 나라가 되려면 / 다수가 소수를 포용해야 하는 이유

주요내용
이상적인 나라가 되려면 / 다수가 소수를 포용해야 하는 이유
「진리는 교수대에, 허위는 항상 왕좌에」
국가의 法, 양심의 法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軍 복무 거부
법의 한계와 개인의 자유 /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법을 많이 만들지 않는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The Republic)」에서 완전한 사회는 시민 각자의 재능을 알고 그 재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賢人(현인)들에 의한 독재국가라고 논증하였다. 현명한 왕은 백성의 재능을 파악하고 훈련시켜서 최적소에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보상하고, 그리하여 사회에서 탐욕과 경쟁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독재자들이 스스로를 그러한 현명한 왕이라고 착각했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러한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진 賢人이 나온 일도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권력에 의해서 부패된 기록만 남겨 놓았다. 사실은 자신의 자유를 그런 현명한 왕에게 온전히 맡기고 행복해 할 백성도 없었다.
현명한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고대 이집트로부터 2차 대전 당시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많은 왕들은 자신들이 神(신)의 아들이라 주장하였고, 중세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나 현재의 마호메트교 국가들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神의 대표자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들에서 인간의 자유는 가장 무참하게 짓밟혀 왔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공화국」에 대한 無神論的(무신론적) 실험이었던 공산주의도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철저한 공산주의 교육은 「현명한 왕」을 산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공익을 위해 탐욕과 경쟁을 초월하여 헌신적으로 일하도록 국민을 감화시키지도 못하였다. 결국 플라톤의 理想(이상)은 전능한 神이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기 전에는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형태의 정부에 대한 실험 끝에, 대부분의 나라들은 다수의 의지에 의하여 다스리는 민주주의가 다수에 대한 소수의 횡포를 막는 최선의 길임을 발견하였다. 또한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여, 탐욕과 경쟁을 막으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원칙으로 세운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가 공산주의 통제경제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플라톤주의의 이상론자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가 가능하고, 자본주의 경제에는 빈부의 차이가 더욱 늘어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소수에 대한 관용, 貧者(빈자)에 대한 보호책이 없는 민주 자본주의 사회는 불안정하여 폭력적인 권력투쟁과 혁명의 희생물이 될 수 있음을 역사는 교훈해 준다.

다수가 소수를 포용해야 하는 이유



다수라는 개념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것은 그 나머지, 즉 소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균일하지 않기 때문에 균일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非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상과 신념에 있어서 다양하게 마련이고, 이러한 다양성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특성이다. 민주주의 국가에 여당이 있으면 야당이 있게 마련이고, 개인의 자유가 허용되는 나라에 다수가 있으면 소수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다수가 다스리는 사회에서 소수에 대한 합당한 견해는 무엇이며, 다수를 따르지 않는 소수를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수가 소수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기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소수가 옳았던 때가 너무나 많았다. 중세기까지 인류 대다수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 15세기에도 지구가 둥글다고 믿은 사람은 소수의 지식인들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지구를 일주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누군가가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미친 사람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신대륙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6, 17세기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과 모든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일찍이 地動說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생명을 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에 생애를 마칠 무렵까지 지동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출판하지 못하였고, 한 세기 후에 그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을 사용하여 직접 실험적으로 증명한 갈릴레오는 1633년 종교 재판에서 지구가 돈다는 이론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그 당시 권력자들의 눈에는, 이 사람들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소수가 옳았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과학 문명에 이바지한 바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들은 각각 현대 천문학과 물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진리는 교수대에, 허위는 항상 왕좌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성 이론은 양자 역학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쌍벽을 이루는 발견이었고, 핵물리학에서부터 천체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물리학 전체의 뼈대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은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여지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1921년에 아인슈타인에게 노벨 물리학상이 수여되었을 때에도,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덜 획기적인 발견이었던 光電(광전) 효과에 대해 수여되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관례적 지혜(conventional wisdom)를 고집해서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가 없다. 과학계에서 흔히 하는 말로 「오늘의 異端(이단)이 내일의 正統(정통)이다」는 것이 있다. 때문에 신중한 과학자는 소수의 새로운 주장을 존경심으로 대한다. 발전이 가능한 인간사의 다른 모든 부문에서도 비슷한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과는 달리 객관성이 부족한 다른 분야에서는 진리가 받아들여지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자기 시대에 순교를 당한 聖人(성인)들도 많았고, 제임스 러셀 로웰의 「진리는 항상 교수대에, 허위는 항상 왕좌에」라는 詩도 나오게 되었다. 다수가 소수를 존중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누구나 어떤 면으로는 소수에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다수에 속하는 사람이 종교적으로는 소수에 속할 수 있고, 한 가지 쟁점에서 다수에 속하는 사람이 다른 쟁점에서는 소수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이 소수에 속해 있을 때, 우리는 누구나 다수의 이해를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황금률에 따라, 우리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인간의 모든 기본권을 가지고 태어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원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한, 그들을 포용하는 것이 도의적인 일일 것이다.

우리는 정권을 잡아 「다수」가 되면 「소수」를 숙청하고 당파 싸움의 악순환을 반복해 온 조선조 500년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신 다수와 소수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 것인가? 소수자의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요사이 매스컴에서 토론되고 있는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로 관심을 돌려 보자.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 거부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기본적 입장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군사 훈련이나 군대와 관련된 어떠한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의 이러한 입장이 획일을 요구하는 독재국가들과 정면 충돌을 해 왔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나치 독일에서 그들은 병역 거부에 더하여 총통에게 손을 들고 『하일 히틀러(Heil Hitler)!』라고 외쳐 경의를 표하는 것마저 거부하였다. 워싱턴 DC에 있는 大虐殺(대학살) 기념관에서 발행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책자에 의하면, 히틀러 치하에서 약 1만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단 수용소에 감금되었고 2500명 이상이 그 안에서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나치와 끈질기게 투쟁한 놀라운 역사를 남겨 놓았다. 2차 대전 중에 일본과 한국에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軍 복무와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고 여러 명이 옥사하였다. 오늘날 일본의 지식인들은 그 기록을 기독교적 인류애의 표본으로 격찬하고 있다.

2차 대전 후, 여호와의 증인들은 소련에서도 말살 대상이 되었고 적발되는 대로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포함한 많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그들의 젊은이들이 병역 거부 문제로 옥고를 치러야 했다. 현재에도 한국에는 1600명이 넘는 적지 않은 수의 새파란 청년들이 여러 도시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들의 병역 거부는 利敵(이적) 행위로 오해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의 끄나풀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한 여호와의 증인은 엄정중립을 지키며, 병역 거부는 그들이 모든 나라에서 일관성 있게 고수해 온 보편적인 입장이다. 점차 많은 정부들이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는 미국과 서구, 남미, 그리고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러시아와 동구의 여러 나라들도 법적으로 양심적 거부(conscientious objection)를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는 대만과 같은 나라도 최근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非군사적인 대체 봉사를 마련하였다는 것은 괄목할 만하다.


이러한 관용적인 정책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범죄자로 취급하여 軍 형무소나 민간 형무소에서 3년을 복역하게 하고 있다. 출감 후에도 그들은 전과자의 기록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단지 종교적인 양심 때문에 동료 인간을 해치기를 거부한 죄밖에 짓지 않았다. 그들은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는 왼편도 돌려대라』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이런 사람들에 대해 보다 넓은 관용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은가?
종교적인 양심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범죄 행위인가? 그들이 현행법을 어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행위 자체가 사회에서 지탄을 받아야 하는 악한 행위인가, 아니면 단순히 법이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국가의 법은 개정될 수 있고 국민과 국가의 관계가 일종의 계약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의 법에 절대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로마 황제에게 분향을 거부함으로써 순교당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믿었고, 2차 대전 후 나치 전쟁범을 심리했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그 점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 역사적인 재판에서 戰犯측 변호사들은 국가의 법이었기 때문에 나치 관리들이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변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의 법보다 더 거룩한 「양심의 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국방이 국가 존속의 현실적인 요구 조건이며 따라서 병역이 국민의 기본 의무 중에 하나로 요구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면에 있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세운 전례를 따른다.

케네스 라토레트(Kenneth Latourette)가 쓴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인과 전쟁」이라는 제목하에서 이렇게 알려 준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로마 세계와 의견을 달리 했던 쟁점 중의 하나는 전쟁에 참여하는 문제였다. 처음 3세기 동안, 우리 시대까지 남아 있는 어떠한 기독교 저술물도 기독교인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무기를 드는 것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반대가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에, 셀서스는 그들에 대한 유명한 공격에서, 만일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들처럼 한다면 로마 帝國(제국)은 가장 난폭하고 가장 불법적인 야만인들에게 희생되고 말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대답으로, 오리겐은 기독교인들이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가 요구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황제 밑에서 싸우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軍 복무를 거부한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 정부의 박해를 부른 부가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인이기 때문에 국가의 법보다 더 높은 양심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21세기의 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처우해야 하는가?
더는 전쟁이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든 전쟁을 하지 않는 세상이 인간의 理想이고 염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세르비아, 보스니아,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믿고 실천했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언젠가 모두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날이 온다면, 그 지역에 마침내 평화가 오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류의 염원이며 현재에도 나라들이 국제 연합을 통하여 추구하고 있는 목표이다. 그렇다면 그 아름답고 숭고한 理想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범죄인으로 낙인찍혀야 하는가? 누군가 그러한 理想의 횃불을 들고 나아가는 자들이 있어야만 언젠가 그것이 실현되지 않겠는가? 종교를 떠난 세속 사회에서도 「惡을 惡으로」 갚지 않고 「善으로 惡을 이기는」 사람들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어 치하한다. 한국의 金大中 대통령도 바로 그러한 인물 중에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동일한 이상을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범죄인으로 감옥에 가두고 일생을 전과자로 지내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는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다수를 위한 것이라면 「자유」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소수가 다수와 다른 양심, 다른 종교를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자유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인간에 대한 어떠한 살생도 금하는 법으로 이해할 자유가 있고, 또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를 聽從(청종)할 자유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법조문에만 기록해 놓고 그것을 적용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보호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많은 전제국가들이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가식적인 것이며 사실상 국가가 자신의 법을 존중하는 데 실패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의 실정에서 국방을 유지하면서 양심적 거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어떤 보호책이 없는가? 민주주의 국가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합리적으로 도출해 낸 代案(대안)이 바로 代替(대체) 봉사제도이다. 이것은 소방서나 병원, 그 밖에 군대와 관련이 없는 산업체에서의 봉사나 사회봉사를 軍 복무 기간만큼 수행하도록 법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이 방안이 실시되는 나라에서 이로 말미암아 국방에 영향을 주었다는 보고는 없었으며, 그것은 성공적인 제도로 정착되었다.

이 마련은 軍 복무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젊음을 낭비했을 사람들을 더 생산적으로 사용하여 국가경제에 이바지하게 하는 부가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뜻이 있는 곳에는 길이 있다』고, 양심적인 거부자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견해와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욕만 있다면 정부의 실무자들이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랍 제국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도 代替 봉사도 요구하지 않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1년씩 세 번 연기할 수 있게 하여 일반 군인의 복무기간이 끝나는 3년 후에는 자동 면제되는 연기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스라엘 국민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국도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미 세계 무대에 들어선 선진국으로서 이제 종교적 소수자들을 위한 代替 봉사를 마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최근 여러 언론기관과 법조계의 인사들이 소수자의 인권 옹호에 관심을 갖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위한 代替 봉사를 제안하고 있는 것은 시기적절하며 대단히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수천년 동안 인간이 실험해 온 정치체제 중에서 다수의 의지에 의하여 다스리는 정치체제가 가장 합리적이고 실제적이었다는 것을 서두에서 지적하였다. 민주주의를 포함하여 어떠한 사회이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법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독재자들은 자신에게 편리한 법을 만들어 「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탄압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개인들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 법이라면 그것은 압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너무 많은 규칙과 융통성이 없는 법은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개인의 독창력을 빼앗아 갈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하나의 경험담을 소개하고자 한다.
1972년에 필자는 처음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관광할 기회가 있었다. 스위스와 독일에서 너무 깨끗한 모습에 호감을 가졌던 반면에, 맨 마지막 코스로 암스테르담에 이르렀을 때에는 길거리와 공원에 동물들의 배설물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래서 관광 안내원에게 『왜 당신네 나라의 길거리에는 이렇게 오물이 많으냐? 당신네 나라에는 법이 없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안내원 아가씨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여 너무 많은 법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도시에서 2차 대전 때 안네 프랑크가 숨어 있던 집을 견학하면서 이 안내원의 이야기가 떠올랐고, 「그렇기 때문에 네덜란드 사람들은 지독한 나치의 점령 하에서도 그렇게 많은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피신시킬 수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안내원의 말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3년 전, 1998년 5월에 암스테르담 근처의 엔쉐데에서 열린 며칠 간의 학회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학기 중이었기 때문에, 발표를 마친 뒤 급하게 공항으로 나가 워싱턴으로 돌아와야 하였다. 그 기차를 타면 공항으로 직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기차가 암스테르담을 통과하여 공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엔쉐데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택시 운전사가, 내가 원래 내렸던 역과 다른 역으로 데려다 주었기 때문에 노선을 잘못 탄 것이었다. 더욱이 돌아가는 길에는 기차가 급행으로 바뀌어 엔쉐데까지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차장에게 물어 보니, 암스테르담에서 엔쉐데까지 왕복 두 시간은 잡아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는 도저히 탈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차장이 다시 돌아오더니 자기 방으로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컴퓨터로 지나가는 기차 시간들을 확인하더니, 『다음 역에 기차를 세울 테니 반대 방향으로 가는 다음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에서 내려 어느 어느 기차로 갈아 타고 공항으로 가라』고 자세히 일러 주었다.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법을 많이 만들지 않는다』



나 하나를 위해서 급행 열차를 세워 주다니! 나는 차장의 개인적 관심과 인도주의에도 감동을 받았지만, 그가 한 사람의 승객을 위해서 급행열차를 세우겠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법을 많이 만들지 않는다』는 26년 前, 그 안내원 아가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제야 깨닫고 새로운 발견에 잠시 압도되었다. 법과 규칙의 규제에 의하여 틀에 박히지 않은 국민이기 때문에 이러한 솔선력과 독창력이 가능하구나! 우리 한국도 하루 속히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인정하고 소수를 관용하는 위대한 사회로 발전하기를 빈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당국자들도 지식인들과 국민들 사이에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는 여론에 귀 기울여,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보호책을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사법부도 근본 정신에 입각한 법에 대한 再해석으로 소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서도 햇볕정책을 실시하여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나라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소수자가 되어 수십 년 동안 꼬리를 물고 감옥 생활을 해 온 국내의 양심범들도 햇볕을 볼 날이 와야 하지 않겠는가?●

白 浩 正 미국 메릴랜드대학 물리학 교수의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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