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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쿠데타: 헌법, 연방대법원,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 (5)

 

 

원저: Daniel Lazare, The Velvet Coup: The Constitution, the Supreme Court, and the Decline of American Democracy(London/New York: Verso, 2001), pp. 85-114.

 

 

5. 긴 작별

 

워터게이트 위기의 여파로 바바라 조던의 간절한 발언이 텔레비전에서 계속해서 방송되었다. 그녀의 존엄성, 그녀의 세련된 어휘선택, 그녀의 모호하게 교수연하는 표정 등 그녀의 행동에 관한 모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최남동부 출신의 흑인 여성으로서 그녀는 온갖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자기 힘으로 뚜렷한 경력을 성취해내었고 이제 최대의 위기의 순간에 공화국을 구하기 위하여 받을 내딛고 있던, 버림받은 인종의 구성원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에게 그녀의 적절한 어구는 반닉슨 저항의 본질적 의미를 규정하는 순간이었다. 공화국을 가장 용감하고 가장 원칙에 입각해서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 진심어린 호소(a cri de coeur)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실제로 조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관하여 생각했을까? 들뜬 신문의 기사들로부터 판단하자면 대답은 아니오이다. 그들이 생각을 했다면, 그들은 조금은 덜 휩쓸렸을 것이다. 결국 미국 헌법처럼 길고 복잡한 문서에 대한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승인을 표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조던이, 자신의 신념은 모든 것이고(whole), 그것은 완전하며, 그것은 총체적이라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을 의미할 수 있었을까? 5분의 3 조항과 70년 이상 동안 노예제를 보호해왔던 다른 규정들에서 헌법은 모든 것이었고, 완전하고 총체적이었을까? 캘리포니아 같은 다인종의 거대 주와 와이오밍 같은 백인만의(lily-white) 썩은 자치구에 대해서 후자의 인구가 98% 넘게 더 작은데도 불구하고 동등 대표제를 부여함으로써 11표의 원칙을 무시해버리는 상원에서, 헌법은 모든 것이었고, 완전하고 총체적이었을까? 각 주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의 총수를 근거로 투표권을 부여함으로써 가장 작은 주들의 유권자들에게 대통령 선거에서 3배의 영향력을 부여하는 선거인단에서, 그것은 모든 것 등등이었을까? 미국 인구의 5%밖에 대표하지 않는 13개 주들에게 다른 95%가 추구하는 헌법적 개혁을 차단하도록 허용하는 헌법수정조항에서, 그것은 모든 것이었을까? 헌법수정조항의 존재 자체가 헌법이 때때로 수선을 요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임을 고려하면, 어떻게 그 스스로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의 문서에 대한 완전한 신념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소 성 미사(the Holy Mass)의 말들과 비슷했다. 즉 사람이 그것에 관하여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들은 더 역설적이 되었다. 미국 정치는 잘못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워터게이트에서 승리했다. 미국인들이 그들의 정부의 근저에 있는 사상들과 씨름하여 그것들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는지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한 번 고대인들의 지혜에 의존하는 일을 잘 해냈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주문(mantra)을 인용하자면 체계는 작동했다”, 즉 정치가 자동주행을 계속하는 동안 사람들은 잠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닉슨 이후의, 재활성화된 권력분립은 의사당에서의 교착상태를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는 카터 행정부를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에게 길을 열어주는 데 일조했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정책을 둘러싼 6년간 최고조의 치명적 대결이었던 이란-콘트라 사건은 어떤 점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재현이었지만, 몇 배나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의 특징은 한물간 첩보요원들로 구성된 비열한 속임수 팀(dirty-tricks squad)이 아니라, 니카라구아의 우익 테러리스트들에게 지원을 보내기 위하여 의회의 통제를 피해가려던 레이건 행정부의 최고위 관리들이 합심했던 노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로 하는 의회의 행동은 너무나 약한 것이었다. 도주하는 백악관을 멈춰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대표들은 올리버 노스라는 이름의 도전적인 해군 대령이 의원들에게 그들은 약하고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민감한 정보를 맡길 수 없다고 이야기했을 때 온순하게 듣고만 있었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노스는, 호된 꾸지람을 안긴 후에, 아래에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후안 페론 스타일로 손을 흔들기 위하여 완전정장 제복을 입은 채로 연방사무소건물의 발코니로 나갔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큰 폭발 없이, 그러나 주눅이 들고 독립적 사고를 할 능력도 잃어버린 입법자들의 신음소리(whimper)와 함께 죽는다. 이란-콘트라는 부시 시대의 예산 마비, 국방성에서 군대내 동성애자 문제를 둘러싼 준 반란(near-mutiny), 1996년 초의 연이은 정부 폐쇄와 7명 이상의 특별검사들에 의한 클린턴 행정부에 대한 외관상 끝없는 수사로 이어졌다. 1998년에 탄핵이 진행되었을 때에는 의회가 저항으로 들끓고 있었고 진부한 헌법이야기를 쏟아내면서 15분간 명성을 얻기를 희망하는, 바바라 조던 지망생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약간 자유주의적인 대통령을 수많은 공격견들처럼 추적하도록 그들을 보낸 것은 당파적 정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볼링브로크가 미국 공화당의 구성원이었다면 틀림없이 말했을 것처럼, 그것은 그 고귀한 구조물, 미국의 긍지, 이웃나라들의 부러움이고, 수 세기동안의 노고에 의하여 고양되어 온 것이라는 등등의 헌법이었다. 아칸소 주의 공화당원 아사 허친슨은 하원 탄핵토론 동안에 헌법은 이러한 상황들에서 따라야 할 길을 제공해 준다고 선언했다. “그 길은 진부할 수도 있지만, 잘 표시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진행할지에 관한 우리 자신의 이론들을 만들어내기보다는 현명하게 그것을 따를 것이다.” 뒤질세라, 캘리포니아의 민주당원인 조 로프그렌은 다음과 같은 말을 쏟아내었다.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해야 할 최선의 일은 빛의 등대이자 우리를 시련시대를 통하도록 할 안내자인 우리의 헌법에 의거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했다. 기초자들의 신성한 지혜를 믿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한 길이었다. 자유는 고대법이 무엇인지에 관계없이, 고대의 법체계에 대한 충실함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고대의 것이었다. 중산층 프랑스어 동사인 empecher, 붙잡다(catch)로부터 유래하는 탄핵의 기원은, 의회가 여전히 스스로를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법을 창조하는 입법기관이 아니라 기존의 법을 적용하는 것을 업무로 하는 하나의 법원이라고 생각했던 14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왕권이 다른 유럽의 왕정들과 비교하여 비정상적으로 강력했을 때 탄핵은 의회 측에서 집행부에 대하여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선구적인 노력을 반영했다. 그러나 중세적 기준에 의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형사법을 이용하는 것은 어색하고 비효율적이었고, 이것이 15세기에는 탄핵이 사용되지 않게 된 이유였는데, 이후 17세기에 다시 단기간 부활되었지만, 1700년대 말이 되면 마침내 거의 사라졌다. 의회는 그것을 시험해 보았고 그것이 결함이 있다고 인정했다. 단순히 왕권을 견제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했던 의회는 직접 집행부의 기능을 떠맡는 긴 과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헌법제정회의에 파견된 대표자들은 영국 정부의 현실적 상태에 익숙하지 않았고 망각을 향해 가고 있던 앵글로-노르만 법의 잔재를 선택하고는 그것을 의회 통제의 주요한 도구로 만들었다. 의회는 1868년에 진보적인 목적을 위하여 탄핵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20세기가 끝나가는 시대에는 전혀 타당하지 않았다. 그 도구의 케케묵은 성격이 그것이 제기될 목적들을 결정했다. 클린턴의 잘못이 무엇이든 간에 탄핵은 정액이 묻은 옷과 대통령집무실에서의 구강성교를 추적하는 신중세적 마녀사냥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었다.

클린턴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더 현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교활한 남부 주의 전 지사로서 클린턴도 역시 자신의 목적에 부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헌법적 상투문구를 늘어놓기를 좋아했다. 1994년에 연방대법관 지명자 스티븐 G. 브라이어를 언론에 소개하면서 그는 브라이어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는 정부가 자신을 내버려두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가 그 점을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의문의 여지없이, 어떤 일에 관해서도 누구든 혼자 내버려둔 적이 없던 사람들인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언급은 클린턴으로 하여금 의사당을 향하여 세심하게 만들어진 메시지, 즉 공화당원들에게 브라이어는 그들이 잠 못 이루도록 할 그런 류의 사법적극주의자가 아님을 약속하는 한편으로 민주당원들에게도 프라이버시권을 강력하게 보호할 것이라는 동등한 확신을 제공하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정치적 수사의 핵심에 있는 세심하게 계획된 모호성(the studied ambiguity)의 본보기였다. 그러나 클린턴의 논평들은 다른 메시지도 보내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그 점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는 그 문장은 또한 양면적인(double-edged)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브라이어가 미국의 발전을 형성했던 역사적 힘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지명자가 역사적으로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그가 원래의 발전형태들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인식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초자 세대들의 원래의 의도(original intent)가 여전히 지고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을 브라이어가 이해한다는 걸 암시했다. 공화당원들과 민주당원들이 정확히 원래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논쟁을 할 수 있지만 미국 정치 게임이 요구했던 것은, 양측이 단순히 18세기의 일군의 부족장들의 유언장을 집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기초자들의 말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할(interpret) 자유는 있었지만, 그들은 그 말들을 무시할(disregard) 자유는 없었다. 승리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그들의 반대자들보다 과거에 더 충실한 것처럼 보여야 했다.

클린턴은 교묘한 처세꾼이어서, 자신의 적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자신의 행정부가 계속 잘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시골풍의 수사를 사용하는데 숙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치세하에서 미국정치의 위기는 계속해서 가속화되었다. 피자, 시가, 그리고 풍만한 백악관 인턴에 약한 클린턴은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불평등이 증대하는 기간을 관장했다. 그의 첫 임기 동안 미국에서 마약 체포는 1년에 44% 늘어나 153만 명에 이르렀다. 1998년 연방 설문조사는 백인들은 불법약물을 5배나 더 사용하지만 흑인들은 그의 임기동안 마약 소지로 체포될 가능성이 [백인들의옮긴이] 5배나 되었고 감옥에 갈 가능성은 13배나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진짜로 전체 교도소 정책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클린턴은 그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을 때 <롤링 스톤> 잡지에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하에서 미국의 투옥률은 36% 늘어서 인구 10만 명 당 690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았는데, 미국 형사체계의 통제 하에 있는(, 수감되어 있거나 보호관찰 또는 가석방 중에 있는) 전체 인구는 650만 명에 달했다. 클린턴은 또한 미국의 사형비율이 3배가 되어 거의 4일에 1명꼴로 집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관장했다. 이란, 파키스탄 및 사우디 아라비아와 더불어 미국은 아직도 중범죄인들을, 18세 미만에 저지른 범죄를 이유로 사형에 처하고 있는 단 6개국 중의 하나였다.

18세기 헌법 덕분에 미국은 말총머리 가발을 쓴 법관들이, 자신들이 12세의 소매치기를 교수대로 보내지 않으면 도덕은 무너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18세기 사법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클린턴은 또한 의사당에서 정치관계가 점점 더 독해지는 기간을 관장했다. 물론 이것이 그의 잘못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멈추기에는 무력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청치 평론가들이 되풀이해서 미국 보수주의의 종언(demise)을 예고했지만, 우익은 더 많은 피를 흘리면서도 지치지 않고 잇따라 등장했다. 이란-콘트라, 조지부시가 당황스럽게 자신의 1988신규 조세는 없다는 공약을 철회한 것, 백악관 대변인 뉴트 깅그리치와 대변인 지명자 로버트 리빙스톤이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들 때문에 연이어 사임한 것어느 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 사건들은 우익의 자기확신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그것을 더 대담하게 만들었다. 점점 더 커지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21세기가 열리는 시대에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기독교 우익의 지배는 결코 경미한 것이 아니었다. 학교 기도 같은 문제들은 대집착(grand obsessions)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릴 것이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레이건이 종교적 과시에 탐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종교적 근본주의는 레이건 이후 극적으로 확장되어서 2000년 대통령선거에는 하나가 아닌 두 명의 거듭태어난(born-again) 후보들이 등장했다. 그리스도를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로 묘사하고 한때는 텍사스에서 연례 예수의 날을 선언하는 포고령에 서며하기도 했던 두비야”(Dubya), 유권자들에게 항상 그의 마음에 있는 제1의 질문은 “WWJD”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What would Jesus do?)라고 알렸던 앨 고어. 실제로 선거운동기간 동안 미국인들은 신앙을 갖지 않을 어떤 헌법적 권리도 없음을 암시하면서 헌법은 종교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religion)가 아니라, 종교 자유(freedom of religion)를 보증한다고 선언했던 것은 공화당원이 아니라 민주당원인 부통령 후보 조 리버만이었다.

미국인들의 우편향(race to the right)은 전적으로 공화당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더 큰 정치체계의 기능이었다. 헌법을 근대화와 개혁의 도구로서 개정하려는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18세기의 신념들에 의거하고 있는 불변의 정부계획이라는 바로 그 사상 자체가 강력한 보수적 영향이었다. 선례구속의 원칙(stare decisis)을 만듦으로써, 선례가 지배한다는 관념은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모두에게 지배적인 원칙이며, 이는 미합중국을 산업 이전 시대의 과거에 묶어두었고 정치체제가 멀어질(pulling away) 위험에 처한 듯이 보일 때마다 되풀이되는 영적인 외침들로 이어졌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최근의 미국 대외정책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기초자들의 목표는 조화로운 하나의 전체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양한 구성요소들 간의 갈등을 이용함으로써 불화(discord)로부터 통합(unity)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서로 다른 부서들이 서로에 대하여 모두 깔끔하게 균형을 이룰 때(balanced) 나타나게 될 평형(equilibrium)은 공화적 미덕의 지표가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각의 정치적 행위자가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역할을 적절한 애국적 열정으로 완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권력 사이의 어떤 불균형(disequilibrium)”도 마찬가지로 부패의 징후로 여겨질 것인데, 그것은 적어도 일부 행위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하트와 네그리는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 정식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권력균형을 전복한다. 자본주의는 그 체계가 부패, 전복과 쇠퇴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방식으로 체계를 고장내버린다. 절정은 근대화주의자들(modernizers)을 사원에서 쫓아내고, 제단을 깨끗이 닦아내어서 기초자들의 가르침을 올바른 명예의 자리로 복원시킴으로써 전복과 쇠퇴를 무력화하려고 정기적으로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런 체계가 오래될수록 그리고 약해질수록, 그런 노력들은 점점 더 과열되어간다. 재생(regeneration)은 점점 더, 공화국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신앙공동체로 확립할 수 있도록 무신론자들이 버려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이는 미국의 점증하는 독실함(religiosity), 애국적이었던 1940년대와 1950년에 대한 향수(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대중적 감상벽의 행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점점 더 늘어나는 역겨운(cloying) 정치적 수사들을 설명해준다. 미국인들이 다시 한 번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회의주의는 제거되어야(banished) 한다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스스로를 믿기 위하여 미국을 믿어야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또한 왜 미국을 되찾자”(take back America)는 구호가 1970년대 이후로 점점 더 흔해져 왔는지도 설명해준다. 미국사회가 점점 더 기능장애에 빠지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고대의 공화국을 납치하여 그것을 진실한 길에서 벗어나도록 했던 다양한 비애국적 요소들의 잘못이어야 한다. 공화국을 건강한 상태로 복원하는 것은 공화국의 방어벽에 침투했던 광부들과 공병들”(miners and sappers)에게서 공화국을 빼앗아서 그것을 고대의 방식으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 우익 경향은 1970년대 초에 시작되어 다음 수십 년간 계속 힘을 얻었던 지구적 자본주의 침체의 결과이다. 그러나 콘드라티에프 장기 파동이 문제의 전부이고 정치구조의 문제는 무시해도 안전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무익하고 비생산적일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가 되면 정부의 3부 모두에서뿐만 아니라 세 수준 모두에서(즉 연방, 주 및 지방), 그리고 정당에서도 역시 점증하는 헌법적 위기를 낳고 있었던,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거의 1세기 반이나 된 양당체계의 정체와 쇠퇴의 문제를 고려해 보라. 기초자들은 전형적인 18세기적인 경멸을 담아서, 정당정치를 공익에 대한 사익의 승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고결한 정치가들은 그런 뒷방 도당(backroom cabals)을 흑사병이라도 되는 듯이 회피했는데, 그것이 바로 워싱턴이 1790년대 초까지 그의 행정부를 몹시 괴롭히고 있던 신랄한 이데올로기적 논쟁들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시스템은 틈새(crack)일 뿐이긴 했지만 대중정치로 가는 문을 개방함으로써 정당들을 고무했다. 1830년대가 되면 정당정치라는 그 사상에 반대하기 위하여 고안된 하나의 정부형태가 그렇게 해서 최초의 근대적 정당체계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휘그당과 토리당이 거의 의회 내 파벌들에 지나지 않았던 때에, 미국 정당들은 가두연설(stump speeches), 횃불행진, 구호들과 선전음악들이 완비된 고도의 극장형 야외정치로 유권자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것은 음미할 가치가 있는 풍자(irony)이다. 그러나 미국의 체계가 정당을 발전 1단계로 끌어올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음 수준으로, 즉 자치적 대중운동의 표현으로서의 정당이라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후자는 유럽의 사회민주당원들이 1870년대에 개척하려고 했고 부르주아 운동들이 곧 모방했던 하나의 형태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조직은 이런 또는 저런 인기 후보자에 대한 일시적인 열광을 선전하기보다는 인민을 기강이 잡히고 노력을 계속하는(dues-paying) 세력으로 조직했다. 정당플랫폼을 정치인들이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는 그만한 쇼윈도우 장식으로 보는 미국적 개념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은 오로지 진행형의 포괄적인 정치적 변화 프로그램을 이행할 목적으로 후보를 냈다. 이들과 같은 정당들(적어도 좌파의 정당들)은 단순히 다양한 정부 부처들 사이에서 정책을 조율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자신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을, 그리고 그들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정치체계를 변혁하는 것이었다. 특수이익의 개별적 대표에 근거를 두고 있는 대의제민주주의는 정당들이 계급세력의 표현으로서 직접 지배하는 새로운 대중민주주의 개념에 입지를 잃었다. 18세기의 신사들이 자신을 정당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타락이라고 믿었던 반면, 새로운 정당활동가 세대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타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낡은 제퍼슨-잭슨 모델을 넘어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극도로 파편화된 정치구조, 제도화된 지역주의,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치를 영원한 기본법체계에 종속시키고 그리하여 사회 전체를 변혁할 단일한 정당이라는 사상을 제거해 버렸던 헌법구조가 그 원인이었다. 정당들은 헌법을 수중에 넣기 보다는 스스로를 헌법의 날개 아래 위치지우고는 그 가치들을 철저하게 흡수했다. 민주당이 북부에서는 인종통합을 지지하면서 남부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짐크로우법을 지지한 것이 예시하듯이, 정당들은 그 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정반대를 말할 수 있는, “빅텐트연합으로 작동하였다. 성장이 차단되면서 정당체계는 급속히 쇠퇴했다. 1946년이 되면 미국정치학회의 연구는 주요 양대 정당들이 남북전쟁 이전 시대로부터 실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는 점, 그들은 전국적 문제들보다는 주와 지역의 문제들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점, 그들의 당원자격은 급속히 관계없는 것이 되어갔다는 점, 특수이익단체들과 로비단체들이 급속히 그들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50년대와 60년대의 일련의 오도된 자유주의적 개혁들은 단지 문제를 더 악화시켰을 뿐이다. 재앙적인 1968년 민주당전당대회 이후 속도를 붙인 예비선거제도는 한 줌의 킹메이커들이 관여하는 폐쇄적 지명절차를 취하다가, 개별 후보들이 소규모의 여론조사꾼들, 선거운동 자문가들, 미디어 전문가들, 그리고 뒤따르는 기자들을 데리고 이 주 저 주로 경합을 벌이며 다니는 혼란스러운 무한경쟁(free-for-all)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후의 지출개혁은 개별 후보들을 점점 더 비싸지는 선거운동에 자금을 대기 위하여 기업 후원을 추구하는 단독사업가들(lone-wolf entrepreneurs)로 변질시켰다. 이제 후보자들은 정치적 지지를 구하기보다는 어떤 것이 지친 대중들에게 팔릴”(sell) 것인지를 보기 위해서 구호들을 시험판매했다. 정치광고들이 세탁세제, 땅콩버터 기타 과잉소비경제의 가공품들에 대한 상업광고들과 구분될 수 없게 되었다.

정당들은 그 전성기에, 의도적으로 금방 무너질 것처럼 만들어졌고 비일관성이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졌던 정부체계에 일정 정도의 일관성을 부과했다. 그러나 정당기율이 저하되면서 부처 간 조율 역시 그와 함께 저하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선출된 부서에 대한 통제를 나누어가지는 분할정부는 20세기 전반부에는 예외적인 것이었지만, 1952년 이후 그것은 세 번 중 두 번꼴로 규칙이 되었다. 1990년에는 미국 유권자의 67%가 여론조사요원들에게 그들은 하나의 정당이 하원 상원과 대통령을 모두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보다는 정치권력을 분열시키는 것을 선호한다고 답하고 있었다. 전문가들과 학자들은 그런 태도가 자멸적인 것이라고 탄식했다. 그런 방식으로 통제권을 분할함으로써 유권자들은 단순히 정부가 어느 때보다도 더 혼란스런운 상황에 처하게 되도록 확실히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비판이 부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더 거대한 메디슨적 체계에 의해 부과된 논리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었다. 견제와 균형이 좋은 것이라면, 유권자들은 각 부처를 별개의 정당에 맡기게 될 추가된 견제는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 사상은 나쁜 놈들(bastards)을 쫓아내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첩자 또는 견제의 역할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두 종류의 나쁜 놈들을 모두 포함시키려는 것 같았다.

정체와 쇠퇴는 두 정당에 동등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정당들이 워터게이트 괴멸로부터 회복하고 난 후에는 공화당이 그들의 군대를 결집하고 일관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데 더 성공적이었음이 판명되었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지식인들은 확고하게 민주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 공화당은 싱크탱크 보수주의자들, 자유시장경제학자들, 그리고 방송 및 인쇄 미디어에서 우익전문가들로 구성된, 그들 자신의 가공할만한 지적 기구를 조합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초가 되면 미디어 포화도(media saturation), “페미나찌정치적 올바름의 흑사병을 비난하는 일부 우익 광신도(enragée)에 의해 공격당하지 않는 케이블뉴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토크쇼를 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공화당에게도 차질이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뉴트 깅그리치의 1994년 미국과의 계약은 공화당 의회 후보들이 그 이행을 약속할 순수한 정당 프로그램을 공화당에 장착시킴으로써 미국 정치를 혁명화하는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분석해보면 그 계약은 깅그리치가 그의 개인용 선거차량인 고팩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홍보용선전물로서, 나중에는 동료 공화당원들에게 강요했던, 날조해낸(cooked up) 설익은 사상들을 뒤섞어놓은 것임이 드러났다. 일단 선출되고 나면 하원의 공화당 의원들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고 사실 그 계약 중 법률이 된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대립을 일삼는 깅그리치의 전술은 1996년 클린턴의 결정적 재선 승리를 위한 길을 닦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만연한 자본주의적 바람은 공화당의 편이었던 반면, 민주당원들은 점점 더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1960년대에 그 정당이 (공화당의 묵인으로) 꿰맞추었던 복지국가는 엉망진창이었고, 과거에는 쟁탈전에서 차단되었던 도시 정치인들에게 혜택들을 던져줌으로써 사회적 평화를 사려는 즉흥적 시도(ad-hoc effort)였다. 복지국가는 지역개발사업의 부패를 제거하기보다는 그것을 팽창시켰으며, 일단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1970년대 후반에 그런 프로그램을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 민주당이 신속하게 철회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1994년에 전국건강보험에 손을 덴 후에 클린턴은 나머지 대통령 재임기간을 주요한 개혁이라는 그 사상으로부터 뒷걸음질치면서 보냈다. 이리하여 작으면 작을수록 더 좋은 미시적 개혁이 그 체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미국에게 나쁜 것은 항상 미국에게 좋은 것에 의해 치유될 수 있다면, 그러면 대통령의 직무는 단지 이미 잘 기능하고 있는 정체를 미세조정하여 그것을 훨씬 더 완벽하게만드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 신경제의 높아지는 파고가 모든 배를 들어올리고 있을 때 누가 개혁을 필요로 했겠는가? 외관상 납을 금으로 바꿀 하이테크 부문의 능력에 넋을 잃었던 클린턴은 자신의 성쇠(fortunes), 어느 때보다 더 밀접하게 월 스트리트, 실리콘 밸리, 그리고 헐리우드의 콘텐츠 제공자들에게 걸었다.

 

정체와 쇠퇴는 세 부처에 동등하게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사법부가 다른 부의 희생으로 득세했다. 여전히 남부의 민주당원들에 의해 지배되던 아이젠하워 백악관과 의회의 무기력을 고려하면, 연방대법원은 워싱턴에서 장기간에 걸친 구조개혁을 떠맡을 수 있는 유일한 지배기관이었고, 이에 따라 약간은 진보적인(remotely progressive) 정부철학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자유주의자 세대 전체가 연방사법부가 어떻게든 미국을 스스로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면 지각변동(perceptual shift)이 진행 중이었다. 의회는 언제나처럼 졸고 있었지만 집행부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케네디는 의사당에서의 정체(logjam)에 막혀 거의 전진할 수 없었지만, 존슨은 1965년 의회를 통해서 신기원의 민권법을 인도해냄으로써 핵심적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도시 반란, 대학 근본주의 및 베트남 혁명이 결합된 희생물이 되었을 때, 세계가 이제 미국 대통령으로 알고 있는 거인(colossus)을 창조하는 일은 그의 계승자에게 맡겨졌다.

리처드 M. 닉슨의 기억이 여전히 일깨우고 있는 경탄할만한 열정들을 고려하면, 그에 관하여 제 정신으로, 균형잡힌 방식으로 서술하기는 어렵다. 전후 자유주의자들에게 그는 정상으로 가기 위한 싸움을 위하여 가능한 모든 더러운 방법을 사용했던 악마의 화신, 선구적인 빨갱이사냥꾼이었다. 아이젠하워조차도 그의 부통령을 공공연한 경멸을 담고 보았다. (19608월에 기자회견에서 닉슨이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기여한 주요한 생각을 인용해 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아이크는 “1주일을 준다면 하나를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케네디(JFK)나 존슨(LBJ)과 비교하면 그의 정책들은 뚜렷이 악명 높은(egregious) 것으로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는 대통령 임기를 그의 두 선임자들이 베트남에서 만들어놓은 진흙탕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싸움으로 보냈고, 칠레의 아옌데에 대한 그의 대우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후안 보쉬에 대한 존슨의 대우나 카스트로와 고딘디엠에 대한 케네디의 대우와 완전히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닉슨의 제왕적 대통령직 창조는 미국식의 견제와 균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쟁이 권력을 순화하기보다는, 어떻게 권력을 자극하여 새로운 수준의 무책임과 남용으로 이끌어가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의회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연방대법원에 의하여 둘러싸였던 닉슨이 1968년 근소한 차이로 승리한 후에 백기를 들어올리는 것이 매우 당연했을 수도 있다. 대신 그는 대담하게 치고 나갔다. 그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공격하고 북베트남을 폭격함으로써 서남아시아에서 전쟁을 확대하는 한편 동시에 하노이를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동맹들로부터 고립시켜 나갔다. 매우 험난한 길에 들었던 국제 자본주의경제에 직면하여 그는 미국 달러화의 금태환성을 끝내고 산업 전반에 걸친 임금-가격 동결을 시행했다. 그런 정책들이 한결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 미국 경제는 그 10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절뚝거렸던 반면 헨리 키신저가 그의 북베트남 상대방이었던 르둑토와 협상한 평화조약은 미국의 패배 규모를 감추는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방식에서 닉슨의 성공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국제정치가 전환점에 달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는 중국을 중립화하고 소비에트 연방과 화해(detente)를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국제노선을 따라 국제정치를 결정하고, 그리고 일반적으로 1989-1991년의 위대한 반공산주의 강경대응(rollback)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과거에는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누가 더 반미적일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 서로 경쟁했지만, 이제 그들은 미국의 지지(favor)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

미국은 새로운 국제적 역할에 어울리는 대통령직을 요구했다. 의회는 권모술수를 부릴 수 있었고 사법부는 거만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오로지 백악관만이 닉슨의 야심찬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작은 속임수와 거대한 국제적 협주를 모두 할 수 있었다. 우드로우 윌슨은 프린스턴 대학생 시절 이래 가장 재활성화된 대통령직이라고 선전해왔으므로, 닉슨이 단지 윌슨의 사상들로 돌고돌아 갔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힘의 환상적인 증대는 백악관을 윌슨이 상상할 수 있었던 어떤 것도 넘어설 만큼 팽창하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은 이제 미국의 제국적 권력, 즉 대통령실을 축소하려는 노력이 일련의 엄청난 대외정책 전환들과 동시에 진행되었을 때 불운한 지미 카터가 소극적으로 승인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관계인, 제국적 권력의 화신이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카디건 스웨터를 입고 불만감”(malaise)에 관하여 수다를 떠는 것이 인플레이션, 오펙의 석유 금수조치나 이란에서 미국 대사관의 탈취와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카터가 그 직의 거대함에 맞춰서 생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미국의 힘은 기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통령을 요구했고, 로널드 레이건이 운 좋게도 그 역할을 채우게 되었다.

어떤 점에서는 미국 대통령은 여전히 캐나다나 유럽의 수상보다 약하다. 입법적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척하지만, 그는 입법부가 그와 무관하게 입법부 그 자신의 본보기를 따를 것임을 알면서 그런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국가 수반(head of state)일 수 있지만, 의회의 사명은 그에게 지속적으로 그가 정부 수반미국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직책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미국 대통령은 상당히 더 강력하다. 그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조신들(courtiers), 정보기관들 및 군대조직들에 둘러싸여 있는 미국 대통령은 마음대로, 자신의 내각이나 부하들 중 누구의 반발에 대한 두려움 없이, 밤이든 낮이든 어느 때든 침공을 개시하거나 비밀작전을 명령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그런 일방적인 과시(display)에 종사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그것은 레이건의 1983년 그라나다 침공, 조지 부시의 1989년 파나마 침공이나 빌 클린턴의 빈번한 순항미사실 사용이 양당 모두의 승인을 받았던 이유이다. 전면전에는 못 미치지만 미국 대통령은 사실상 세계 어느 곳에서건 그가 원하는 사람을 공격할 백지위임장을 가지고 있다. 그의 권력에 대한 유일한 견제는 그의 표적들 중 하나가 언젠가 반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떤 제왕적 권력도 받아들일 수 없는 두려움밖에 없다.

1998년 공화당의 탄핵 요구는 대통령직을 적절한 공화적 규모로 축소하려는 노력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공화당은 클린턴의 행태가 지나치게 제왕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제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클린턴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욕을 통제할 수 없었고 따라서 그 직을 모욕했다고 판단되는 1960년대의 병역기피자이자 마리화나 흡연을 하는 아이였다. 공화당의 공세는 백악관을 축소하기보다는 훨씬 더 엄청난(gargantuan) 규모가 되도록 부풀리려는 시도였다.

 

2000년 대선을 위한 무대는 그렇게 마련되었다. 대통령직의 신비가 이보다 더 부풀려졌거나 선거과정이 이보다 더 길고 비쌌던 적은 결코 없었다. 두 주요 후보자들은 중도층의 신임을 확보하려고 노심초사하느라 공허한 일반론만 말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인민에 대한 사랑을 천명했으며 시장 지분을 증대시키려고 희망하면서 가장 진전된 세일즈기법을 사용했다. 그들은 핵심 집단을 소집하고 여론조사를 행했으며, 유권자 윤곽을 분석했고 구호들과 제안들을 시험판매했다. 그러나 양측의 극도로 세련된 마케팅 기법들은 서로를 상쇄하는 것으로 끝났을 뿐 아니라 유권자들을 실망시키는 것으로 끝났다(ended up turning voters off).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정치적 등가물에 직면한 유권자들은 두 경쟁 제품들에 직면한 지친 소비자들처럼 반응했다. 점점 더 외모나 개인적 행실과 관계있는 사소한 기준들에 결정의 근거를 두면서, 유권자들은 거의 반반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미국인들이 토론할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형, 임금 정체, 지구 온난화, 총기 문화 그리고 징벌적이지만 초점 없는 마약과의 전쟁 때문에, 미국인들은 토론할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어는 너무 소심하거나 타협적이어서 그런 문제들 중 어느 것도 정면으로 다루지 못했다. 노동계급과 상층계급 미국인들 사이의 경제적 간극은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8년 동안 확대되었고, 마약과의 전쟁은 강화되었던 반면에 총기 규제에 관한 뜨뜻미지근한(half-hearted)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행정부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화석연료 소비를 감축시키기보다는 그 가속화를 허용했다. 고어는 사형의 지지자였기에, 그의 맞수가 텍사스 지사 저택에 있는 동안 100건이 넘는 사형을 집행했다고 비판할 입장에 있지 못했다. 실제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부시가 무고한 사람이 사형집행되는 일이 없도록 보증하기 위하여 고안된 일정한 법적 안전판들을 설치하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사형은 공정하게 운영되는 한 괜찮은 것이었다. 마침내 고어가 편하게 논의할 수 있다고 느꼈던 유일한 문제는 처방약의 비용 증가였고, 그는 그것을 그의 선거운동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시스템은 정치적 논의가 가장 확장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을 제약하는 작용을 했다. 랠프 네이더가 그의 돈키호테식의 제3당 선거운동을 고집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화를 내며 그에게 대들었다. 그들은 그가 방해입후보자(spoiler)라고 말했다. 그는 좌파적 입장에서 고어를 공격함으로써 우파의 수중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유권자들은 6개가 넘는 정당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이더가 미국인들이 단 두 개보다는 더 많은 정당들 중에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었다. 1856년 이래 사실상 모든 선거에서 미국인들은 공화당 또는 민주당을 선택해 왔지만, 이 한정된 메뉴는 시스템이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선거일 후 네이더를 향한 민주당의 분노의 수준이전의 대통령 후보자 마이클 듀카키스는 그가 조지 W. 부시가 알 고어를 이기도록 돕는다면 내 맨손으로 그 자식(guy)의 목을 조르겠다고 위협했다으로부터 판단해보자면, 달리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 형사책임은 없지만 유죄였다.

 

부시는 선거운동 중에는 특히 감상적인 인상을 주었다. 불분명하고 불안해하였기 때문에 부시는 유권자들에게 민주당이 잘못했던 영역에 대한 대안적 비전이나 포괄적인 비판을 통하여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의 언어오용(malapropisms)은 전설적이었다. 모니카 르웬스키 사건 동안 클린턴의 언어적 왜곡을 언급하면서 그는 어느 지점에서 워싱턴 DC의 홀에서 결코 다시는 내가 설명할 수 없다는 설명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선언했다. 사회보장의 사유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민주당을 공격하면서 그는 또 다른 선거운동 청중들에게 민주당은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그것이 일종의 연방프로그램인 것인 양 연방정부가 통제하기를 원한다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정한 강점이 없지는 않았다. 텍사스 레인저스 야구팀의 총지배인이자 텍사스 주지사로서 그는 상냥함(affability)을 예술의 형태로까지 끌어올렸는데, 이것은 이제 그가 자신의 극우파적 견해를 감추고 그가 실제로는 보수적인 옷을 입고 있는 온건주의자라고 적어도 일부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었다. (사실 그는 온건한 옷을 입고 있는 극우파였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무장해제시킨다고 인정한 달콤한 류의 수사를 실행했다. 그는 또한 비정상적으로 단합된 강력한 사업가계급(business class)의 후원을 즐겼다. 재건의 쇠퇴기에 기원을 둔 초(hyper)제퍼슨적인 국가헌법 덕분에 텍사스에서 정치권력은 나라 전체에서보다 훨씬 더 분화되어 있었다. 주지사의 직이 약했을 뿐 아니라 입법부 역시 약했고, 진정한 권력은 장례식장부터 교도소까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약 200개의 준자율적 행정위원회들에게 있었다. 이런 종류의 파편화는 주에서도, 연방에서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즉 그것은 효과적인 공중의 감독을 배제하고, 민주주의를 주변화하는 반면에 실제 정부 업무는 부유한 사업가들이 정부 내의 친구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닫힌 문 뒤에서 일어나게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텍사스는 일련의 엄청난 부자들보수파들과 반동주의자들이 주 정치에 끼어들어가서 대체로 비정치화된 대중들과의 싸움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도해왔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이렇다.

 

[]지사는 보통 기업 엘리트의 구성원이며 강력한 지방, 주 및 전국적 엘리트들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지사의 권력, 지위 및 권위는 작은 정부, 낮은 조세와 낮은 지출이라는 보수적 목표에 성공적으로 이바지하기에 충분히 적합한 복잡한 형태의 공식적 및 비공식적 권위에 있다.

 

따라서 분열된 지배구조는 비정상적으로 통합된 지배계급이 무대 뒤에서 고삐를 잡을 수 있게 했다. 자신의 산업에 혜택을 주는 것을 제외한 어떤 그리고 모든 정부프로그램에도 반대하는 석유기업가들에 의해 지배되었기 때문에, 텍사스 사업가들은 그들을 위하여 아낌없는 노력을 해준 부시에게 감사했고 은혜를 갚기를 열망했다. 중대상황(crunch)이 왔을 때 그들은 부시의 선거운동에 돈과 도덕적 지지와 전문지식을 대규모로 보냈다.

선거일에 시작된 엄청난 충돌(crack-up)은 헌법적 장치의 산물이었고, 그 장치는 전면적 점검을 받아야 할 때가 너무 오래 전에 지나버려서 그 장치에 의존해 왔던 사람들이 그 말[헌법규정옮긴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어버렸다. 본질적으로 문제는 제2조 중 선거인단 구성원들이 어떻게 선택될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는 2세기나 된 절[2옮긴이]에 있었다. 그것은 각 주는 그 주의 주 의회가 정하는 규칙에 따라, 그 주가 연방 의회에 보낼 수 있는 상원 의원과 하원 의원의 총수와 같은 수의 선거인을 임명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1조가 각 주에게 의회 의원 선출에 대한 광범위한 재량을 부여한 것처럼, 2조는 각 주에게 대통령 선출에서도 똑같은 여지를 주었다. 주들이 결과적으로 적어도 일정 부분의 유권자가 인민 투표를 통하여 스스로 선거인들을 선택하도록 할 수도 있었지만, 2조는 연방정부의 어떤 것에도 양보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암시하는 것이었다. 1965년 민권법은 결과적으로 워싱턴이 가장 극심한 형태의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방선거에 개입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일반적인 가정은 개입은 원칙이라기보다는 예외이고 통제권은 본질적으로 계속해서 주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주의 자율성이 1780년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든 간에, 2000년에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현대에는 스스로 민주적이라고 이해하는 어떤 정부도 자유롭고 공정한 전국적 선거들의 실행을 정부 최고의 책임으로 본다. 정부가 이렇게 보는 것은 인민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국내외에서 그 자신의 민주적 신임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노후한 헌법은 책임을 직접 전국적 정부의 수중에 두지 않고 연방정부에 대한 관계를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라고 보는 주들의 수중에 두었다.

이것이 117일 이후 사건들이 왜 그렇게 빨리 통제불능상태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이다. 플로리다가 유권자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유일한 주는 아니었다. 실수, 기술적 결함들, 그리고 조직적 문제들이 뉴멕시코 주 앨버쿼크에서 투표를 혼란스럽게 했는데, 거기에서는 처음에 약 60,000표의 부재자투표가 계산되지 않았고, 아이오와 주의 스콧 카운티에서는 흐릿한 팩스 때문에 부시가 2000표의 초과 득표를 했으며, 위스콘신 주의 아우타가미 카운티에서는 오자로 부시가 수백 표를 더 얻었고,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에서는 거리에서 출구조사요원인 체 하는 신원불명의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부재자투표를 들고 도망쳤다. 앨라배마 주의 셀마에서는 백인 선거관리가 투표시간 제한,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곳에 투표소 설치, 그리고 선거를 어렵게 하거나 혼란스럽게 하기 위하여 고안된 전술인 유권자들을 시연방 선거에서 상이한 선거구에 할당 등의 유서 깊은 책략들을 통해 흑인 투표를 저지하려고 공모했다. 그러나 이들과 같은 조치는 권한과 성실성이 가지각색인 일군의 지방관리들에게 거의 전적인 통제권을 부여하는 체계에서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상한 것은 이런 결함들이 적어도 하나의 주에서 결과를 위협할 것이라는 점이었고 플로리다주가 그런 주였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헌법은 선거를 운영함에 있어서 플로리다주에 방대한 재량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명백히 잘못된 집계(tally)가 유지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 주의 공화당 지배층에게 방대한 재량을 부여했다. 고어가 주 전체의 재검표를 요구했을 때 부시 캠프는 그런 생각은 정당하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다면서 거부했다. 고어가 67개 중 4개의 카운티에서만 재검표를 요구했을 때 공화당은 일부만 집계를 하고 모든 곳을 집계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부시의 리드를 무력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필사적이었기에 공화당의 전략은 불필요한 소송을 제기하고 관할 이전을 신청하고 재검표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일군의 부재자 투표에 관한 논쟁이 공화당 법률가들이 위험스럽게도 자유주의자라고 우려했던 한 흑인 여성법관에게 배당되었을 때, 그들은 그녀가 판결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회피할 것을 요구했고, 항소법원에는 그녀를 제척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작동하지 않자 또 다른 항소를 제기했고, 사건을 다른 법관에게 제기된 사건과 병합시키려고 시도했으며, 마지막으로는 배심재판을 요구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법관은 공화당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플로리다 주 최고법원이 부시의 플로리다 선거캠프 공동의장이었던 국무장관 캐서린 해리스가 그녀의 후보가 승자라고 선언하지 못하도록 했을 때, 공화당이 제어하던 주입법부는 그에게 선거 자체를 수여하겠다고 단언했다.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의 정치적 압력을 보여주는 경악할 일이었다. 고함을 치는 공화당 활동가 군중들이 마이애미 선거관리위원회를 위협하여 고어를 1위로 올릴 수도 있는 재검표를 중단하도록 했을 때, 민주당은 또 다른 소송들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탈라하시의 보수적인 주 법관은 소송을 기각했고 주최고법원은 검표 재개를 명령했지만 충분한 시간을 할당하지 못했던 반면에 철면피같이 당파적이었던 미국 연방대법원은 주정부가 최종적으로 전국 선거를 장악할 헌법적 권리가 있다고 결정했다.

연방대법원의 보수적 다수는 주입법부가 주 전체의 선거를 선거인단 구성원을 지명할 주의 권한을 이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개별 시민은 미합중국 대통령에 대한 선거인 선출을 위한 투표를 할 연방헌법상의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달리 말하자면 주의 관리들은 자유롭고 정직하며 공정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고, 사실 그들은 대통령선거를 전혀 실시하지 않아도 됐다. 전근대적 미국헌법은 연방정부에게 그 스스로의 민주적 신임장을 확립할 권한을 부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들이 대통령선거를 마음대로 잠식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바바라 조던의 열정적인 언급들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연상되듯이, 문과 창문을 두드리고 민주당원들을 두들겨 패고 집계를 멈춰라! 사기를 멈춰라!”하고 소리치는 성난 공화당원들의 폭도같은 이미지는 오래도록 200011-12월의 사건들과 연상될 것이다. 미국이 확실히 그 몫의 격동의 시위들을 목도했지만, 이것은 내 기억으로는 양대 정당 중의 하나가 투표 집계를 가로막기 위하여 군중폭력을 이용한 최초의 일이었다. 공화당은 항의자들은 단순히 관련된 시민들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그 군중들에는 하원의 다수당 원내총무실(the office of the House Majority Whip)의 정책분석가 톰 딜레이, 하원법사위원회 직원으로 있는 변호사, 전국공화당의회위원회(the National Republican Congressional Committee) 직원, 프레드 D. 톰슨 상원의원의 전 보좌관 등등 많은 공화당 고위당직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반(rank-and-file) 시민들이 아니라 헌신적인 전선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벌인 싸움은 효과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구도 개입할 수 없고 혼돈에서 질서를 회복할 수 없었던 극도로 취약한 순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화당원들은 그런 진공 상태에서 개입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시와 부통령 후보 딕 체니는 그런 전술과 절연하기보다는 며칠 밤이 지난 후 포트 로더데일에서 열린 공화당의 승리축하파티에서 그 조직가들을 축하했고 그 공격에 관하여 농담을 했다.

미국 극우파의 준공식적 게시판인 <월 스트리트 저널> 사설면은 이 기간 동안 특히 도발적이었다. 고어가 정직한 재집계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그가 쿠데타 시도를 개시한다고 신속히 비난하면서, <월 스트리트 저널>은 권력을 잡으려는 부당한노력을 하고 결과를 뒤집기 위하여 대중선동을 한다고 고어를 비난하는, 전 마약왕 윌리엄 베넷과 같은 우익 대변인들에 의한 기사들을 게재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 칼럼니스트인 폴 A. 기곳은 공화당의 마이애미 공격은 조지 W. 부시를 위해 대통령직을 구할 수 있도록 []적시에 깔끔하게 일어났던 부르주아 봉기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일은 매큐빈 토머스 오웬스라는 이름의 해전대학(the Naval War College)의 무명 교수에게 맡겨졌다. 플로리다 주의 고어 진영 노동자들이 해외 군대 인사들의 부재자투표 다발에 이의를 제기한 데 분노하면서, 오웬스는 마이애미 봉기가 있었던 1122일자 <저널>에 민주당원들을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성적 지향의 정치의 이름으로 군대에 반대하는 유례없는 캠페인에 종사[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객원사설을 썼다. 그는 이 문화전쟁에서 위태롭게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제도로서 군대의 장래 효과성이라고 썼다. “군대는 단결력과 사기에 최우선성을 두기때문에, 군대는 육체적 및 도덕적인 용기, 명예 및 의무감, 기율, 직업적 행동강령, 그리고 충성심 같은 무도정신(martial virtues)”을 강조한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의 민간인들에게는 낯선특질들이며, 특히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그리고 다문화주의적 민간인들그에 따르면 민주당이 대체로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들이다.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오웬스와 그의 편집자들에 따르면, 마이애미의 공화당 반란참가자들은 헌법과 군대를 대표했던 반면 민주당원들은 페미니즘, 동성애 및 인종적 다양성의 이름으로 미국의 국방을 잠식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2주 남짓 만에 헌법의 위기는 미국 사회의 가장 깊은 분열들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 갈등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아니라 이제 완고한 전사들(stern warriors)과 퇴폐적인 방랑자들(decadent bohemians) 간의 갈등이 되었다. 민주당은 고어의 승리를 많이 원했지만 그들은 격렬한 공화당 강경파에 의하여 끌려나갔다. 고어가 법원에서 결과를 뒤집는데 성공했다면 공화당은 어떻게 했을 것인가? 더 많은 부르주아 봉기들이 뒤따랐을까?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까? <5월의 7일간>(Seven Days in May) 같은 시나리오도 더 이상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 지점 이후로 법원들은 점점 더 공화당의 기정사실화(fait accompli)를 존중했다. 129일에, 연방대법원의 보수적인 대법관 안토닌 스칼리아는 재집계 중단을 명령했다. 그 근거는 그가 그의 선거의 정당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구름을 드리움으로써 청원인과 그리고 이 나라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마치 재검표를 중단시키는 것이 민주적 정당성을 잠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3일 후 스칼리아는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이유로 재검표를 통째로 끝내자고 법원의 다른 4명의 보수적 구성원들과 합류했다. 웅변적 반대의견에서 자유주의적 대법관 존 폴 스티븐스는 그 판결이 사법부의 역할에 대한 가장 냉소적인 평가를 증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썼다. “우리가 금년의 대통령 선거의 승자의 정체를 결코 확실히 알 수는 없을 것이지만, 패자의 정체성은 명확하다. 패자는 법관은 법의 지배의 불편부당한 안내자라고 하는, 법관에 대한 국가의 믿음이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국가의 신뢰 전체가 흔들렸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개인의 신뢰는 그렇지 않았다. 그 판결 직후에, 법원 앞에서 고어를 위하여 주장을 펼쳤던 자유주의 헌법학자들의 수장이었던 로렌스 트라이브는 그의 고객에게 칼로 자결하라고 요구했다. “내 생각에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품위있는 일일 것이라고 하버드 법대 교수는 선언했다. “내 생각에 고어 부통령은 대법원이라는 기관에 대한 경외심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거나 품위있다고 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결과를 수용하려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법원에 대한 존중은, 인민의 의지가 사법적 사제들(priesthood)의 의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고어는 선택할 수 있는 사항들을 하루 동안 고려한 후에 가르침대로(as instructed) 했다. 그는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연설에서, “우리 위대한 로스쿨들 중 하나의 도서관에는 사람 아래가 아니라 신과 법 아래에서라는 좌우명이 새겨져있다. 그것이 미국적 자유(freedom)의 지배원칙이고 우리의 민주적 자유들(liberties)의 원천이다. 나는 마치 그것이 지난 5주의 모든 복잡한 쟁점들에 대한 숙고를 안내해 왔듯이 이 경합을 통해서 그것을 나의 지침으로 삼고자 했다.”고 언급했다. 요점은 그가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승인하고 자신의 선거운동을 끝내는 것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론은 보편적으로 그 연설을 칭찬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잠깐 멈춰서, 고어가 미국 민주주의의 성격에 관하여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고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버드 로스쿨 도서관 위에서 보이는 사람 아래가 아니라 신과 법 아래에서13세기 중엽 헨리 3세 치하에서 왕실 대법관으로 봉직했고, <영국의 법과 관습에 관하여>(De legibus et consuetudinibus Angliae)(“On the Laws and Customs of England”)의 저자인 헨리 드 브랙튼(Henry de Bracton)의 모토였다. 그것이 개진한 원리는 근대 민주주의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아직 수 세기 후의 것이었다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사회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위에 있었던 기존의 실재로서 중세적 법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인민주권 원리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이용하기 위한 공리주의적 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숭배하고 찬양하는,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대부분은 복종하는 어떤 것으로서 법 개념을 대변했다. 중세 정치이론은 법을 특정한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지만, 어떤 권위자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법이 인민의 산물이고 그들의 의지에 좌우되며 그들의 자유의지(volition)에 의하여 변화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하지는 않았다. 생각의 순서가 오히려 뒤바뀌었다. 즉 살아있는 신체가 민중(folk)의 조직 원리와 동일시될 수 있지만, 아마도 공동체 기구로서 민중은 더 진정으로 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따라서 고어가 개진한 것은 사람들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들을 만드는 어떤 것이라는 전근대적 헌정주의 개념이었다. 본질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던 것은 유권자들이 어느 한 쪽으로 결정했더라도 법은 달리 결정했다는 것, 그리고 고어에 따르면 후자의 평결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고어는 민주주의의 근거를 인민주권에 두기보다는 정반대의 것, 즉 인민이 그들의 명령을 넘어서는 불변의 법적 구조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에 두고 있었다.

선거는 헌법적 기구를 통제하는 정당이 정치권력을 통제하는 정당임을 확증했다.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역사적 유추는 귀족계급이 부상하는 중간계급을 억제하기 위하여 고대의 헌법적 대권을 점점 더 많이 이용하기 시작했던 18세기 프랑스에서 귀족의 반동이다. 보수적 기구로서 귀족정의 목표는 돈과 권력이 오로지 귀족 출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하여 점점 더 경직적인(sclerotic) 체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귀족계급은 그 편에서 전통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중간계급이 가진 것은 구체제가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특질들, 즉 능력과 쪽수(numbers)뿐이었다. 공화당은 두 부르주아 정당들 중 더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주의 권리, 권력분립 등등을 단순한 다수지배보다 격상시키는 점점 더 보수화된 시스템에서 치러진 2000년 선거에서, 유사한 이점을 향유했다. 공화당이 그런 특권들을 옹호하면 할수록 기본적인 민주적 규범들에 대한 그 적대성은 점점 더 커져갔다. 플로리다 주 입법부가 승리를 거둔 회기 뒤에 젭 부시와 함께 어슬렁거리던 어느 고위층 공화당 로비스트가 떠들어댔다. “난 모든 것을 가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자들은 행복하고, 나는 집에 갈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정치구조를 점점 더 좁은 최상위 계층의 이익에 맞추는 데 능숙한 한 계급전사의 행복한 외침이었다.

 

예측대로, 2000년 선거의 해의 혼란은 선거인단 폐지 요구들로 이어졌다. 그 요구들 중 하나는 힐러리 클린턴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뉴욕에서의 선거 승리 며칠 후에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항상, 우리가 선거인단에 대한 요구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내가 상원으로 가게 되었으니, 인민 투표, 인민의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도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요구는 뉴욕대학교 법학교수인 로널드 드워킨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뉴욕서평>(New York Review of Books)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제 이 낡아빠지고 위험한 18세기 시스템을 폐기처분할(junk) 어느 때보다 좋은 최고의 기회를 가지고 있다. 공중은 의회가 그 시스템을 철저하게(root and branch) 제거할 헌법수정 과정을 시작할 것과 전국의 인민투표 다수결에 의한 대통령 및 부통령 직접 선거로 그것을 대체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약간의 산수만으로도 그런 어떤 헌법 수정도 불가능하다(out of the question)는 것을 보여준다. 선거인단으로 인하여, 하원에서 1명의 의원만을 선출하는 가장 인구가 적은 7개 주의 유권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3배가 될 뿐 아니라 2명의 하원의원을 선출하는 또 다른 6개 주의 유권자들의 영향력은 2배가 되며, 3명을 선출하는 다른 4개 주 유권자들의 영향력도 대략 3분의2만큼 증폭된다. 이는 제5조의 3분의2/4분의3 규칙이 어떤 헌법 개혁 노력도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단 13개 주라는 최소치보다 상당히 더 많은 것이다. 그 결과 어떤 기적적인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압도적으로 농촌지역에 있고 백인이 많은 작은 주들은, 그 시민을 도시에 있고 다인종으로 구성된 큰 주들의 시민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도록 할 어떤 변화도 가로막을 정도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연방대법원이 11표 원칙은 주 및 지방 수준에서도 지배해야 한다고 1962Baker v. Carr 판결 이래 되풀이해서 선언해 왔지만, 헌법은 연방 수준에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우리 인민이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제에 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했던 것처럼 우리 인민은 무력해서 이제 선거인단처럼 명백히 부당한 장치를 제거할 수도 없다. 고대 헌법은 민주적 자유를 보증하기보다는 그것들을 부정하고 있다.

Bush v. Gore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후 몇 주 만에 공화당 승리의 여러 차원들이 차츰 분명해졌다. 전후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당이 완승을 거두어, 집행부와 입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에 대해서도 통제권을 장악했다. 1212일 판결 당시 76세였던 윌리엄 렝퀴스트 연방대법원장은 그가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한다고 여기는 인물이 그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아는 상태에서 안심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대통령집무실을 차지한 최초의 보수파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조지 W. 부시는, 미국의 고도로 과열된(charged) 지정학 측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남북전쟁 전부터 보더라도 최초의 남부 출신 보수주의자였다. 한편 알 고어는 저널리즘을 가르치기 위해 워싱턴을 떠났고, 빌 클린턴은 일련의 임기말 대통령 사면을 둘러싸고 점점 커지는 격분 속에서 뉴욕 교외에서 불명예스럽게 웅크리고 있었던 반면, 2004년이나 2008년에 잠재적 대통령 경쟁력이 있는 사람으로 널리 여겨졌던 힐러리 클린턴은 비슷하게 무력화되었다. 자유주의적 경제학자 로버트 쿠트너가 다음해 1월 한 잡지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마치 무혈 쿠데타 이후의 나라 같다. 일상생활은 계속된다. 길들여진 미디어는 달래는 소리만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의식들은 지속되고 있다. 야당은 반대하는 시늉을 하지만, 예기가 없다(toothlessly).” 그러나 민주주의의 실질은 상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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