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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쿠데타: 헌법, 연방대법원,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의 쇠퇴 (2)

 

 

원저: Daniel Lazare, The Velvet Coup: The Constitution, the Supreme Court, and the Decline of American Democracy(London/New York: Verso, 2001), pp. 14-31.

 

(미주(저자) 및 각주(옮긴이)를 포함한 번역문은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2. 관념

 

미국식 헌법숭배의 불행한 측면들 중 하나는 그것이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취하면서 그것을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모세 이야기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국가적 신화가 우리에게 준 것은, 현실의 문제를 통해 길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현실의 사람들이 아니라, 1960년대의 한 베스트셀러가 필라델피아의 기적이라고 매우 진지하게 묘사했던 일에 참여한 헌법기초자들(the Founding Fathers)로 알려진 일군의 부족장들이었다. 미국 헌법의 성장과 발전의 진짜 이야기는 어떤 것이든 그런 1차원적 설명이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헌법은 2세기 동안의 식민화, 혁명과 내전이라는 한 과정, 즉 영국이 처음으로 신세계 침략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던 1500년대 말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시작되어, 2세기 후 이제는 부유하고 광대한 제국이 되어버린 것을 런던이 서투르게 취급함으로써 최대의 조각이 떨어져나가도록 만들었던 조지 3세 치하에서 종결되었던 한 과정의 산물이었다. 그토록 풍부하고 복잡한 역사적 시대에 관하여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것이 역사적 발전의 속도에서 엄청나게 가속되었다는 특징을 가졌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가 브리티시 군도잉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및 스코틀랜드를 런던에 본부를 둔 공통의 연합으로 통합하고 있는 동안, 대영제국은 그 힘을 카리브해에서 세인트 로렌스까지 확장하고 있었다. 1694년에 설립된 잉글랜드은행은 대형금융기관(high finance)을 혁명화하고 있었고, 아이작 뉴턴 경은 과학을 혁명화하고 있었으며, 다니엘 드포 같은 작가들은 문학을 혁명화하고 있었던 반면에, 170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계속해서 맨체스터, 버밍햄 및 글래스고우 같은 도시들은 생산을 혁명화하고 있었다. 브리튼이 여전히 이류 열강이었던 1700년에는, 대륙의 교육받은 남녀들이 더 이상 스웨덴어나 네덜란드어 대신 영어를 배워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1800년이 되면, 영어는 급속히 관습상 필요한(de rigueur) 언어가 되고 있었다.

이 기간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이 가속화된 발전속도와 나란히 그것에 휩쓸렸던 사람들 측에서의 가속화된 지적 저항이 생겼다는 것이다. 대서양 양안에서 영국인들은, 한 지역의 근대화는 반드시 다른 지역의 반근대화에 의해 상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준뉴턴적인 보존의 법칙에 동의했다. 과학과 경제학이 더 돌진할수록, 다른 영역, 무엇보다도 특히 법과 정치는 고정된 채 남아있는 것이 더 중요해보였다. 법률용어로 말하자면, 이 기간은 고대 헌법”(the Ancient Constitution), 즉 영국은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로 태어났고 그 고대의 원리들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정도로만 그런 국가로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의 전성기였다. 아무도 고대 헌법을 성문화시킨 적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개념은 극도로 가단성 있는(malleable) 것이었다. 그것은 더 강력한 의회 또는 더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적 원시주의(democratic primitivism), 즉 고대 시대가 더 자유로웠고 현대 시대는 자유의 상실을 목도했으며 자유를 되찾는 방법은 과거의 굳건하고 오랜 원리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는 믿음이라고 묘사될 수 있는 것을 반영하기도 했고 강화하기도 했다. 근대화가 한 측면에서 과거와의 유대관계를 더 많이 단절할수록, 다른 측면에서는 그 유대관계를 재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더욱이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즉 모든 관념들을 물들였던 깊이 뿌리내린 사고습관이었다. 고대의 원리들로 되돌아감으로써 자유를 다시 얻을 수 있다면, 그러면 개혁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이전의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근대 세계의 모든 진흙과 수렁을 제거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이 뒤따랐다. 좋은 정부는 새로운 정부가 아니라 오래된 정부였고, 더 오래된 것일수록 더 좋았다. “국가당반대파(the Country Opposition)로 알려진 매우 영향력있는 사상학파의 지도자였던 헨리 세인트 존 볼링브로크(Henry St. John Bolingbroke)1749년에 다음과 같이 썼듯이. “좋은 정부의 지속을 연장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부를, 조건이 허락한다면 언제나 그것이 건립된 근거로 삼은 최초의 좋은 원리들로 되돌리는 것뿐이다.” 진보란,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를 의미했다.

정치구조의 측면에서는, 이런 종류의 원시주의(primitivism)가 견제와 균형, 권력분립의 미덕과 헌법적 균형의 최우선적 중요성에 대한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믿음으로 나타났다. 1485년부터 1603년까지 통치했던 튜더왕조 치하에서 영국은 정치사가들이 중세후기헌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시 꽃피는 것(re-florescence)을 보았다. 대륙에서는 절대왕정이 대의적 의회를 차례차례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영국에서는 왕권의 성장이 광범위한 정치제도들의 권력이 동시에 성장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런 정치제도들에는 단순히 의회의 두 원들뿐만 아니라 법학원들, 보통법의 요새였던 런던법과대학들, 지방자치단체들, 교회와 대학들, 런던시 등과 같은 다른 독립적 권력중심들도 포함되었다. 그런 권력 각각은 모든 관계자들이 옛날부터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고유의 권리와 특권을 지키려 애썼을 뿐 아니라, 각각의 권력은 국력이 각각의 개별 부분들의 권리들에 대한 존중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복잡한 정치구조속의 각 요소가 자신의 오랫동안 존중받아온 대권들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될 때에만, 전체의 조화가 확보될 수 있었다. 헌법이론가 못지 않았던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에서 언급했듯이, “행성들이 사악한 혼합물로 무질서하게 뒤섞여서 돌아다닐 때, 어떤 질병이 그리고 어떤 징조들이, 어떤 반란, 어떤 성난 바다들, 지진이 국가들의 통합 그리고 그와 결합된 평온을 찢어발겨서 쫓아내는가.” 통합과 평온은 자기 자신의 유서깊은 길을 지키면서 어떤 다른 길로도 빠져 헤매지 않는 각각의 기관에 달려 있었다.

그런 화려한 구조를 규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6세기 이후 영국의 모든 국왕들이 직면한 문제는 그들의 권력의 전통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의 통제권을 확장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1509년부터 1547년까지 통치했던 헨리 8세가 대륙적 방식의 솔직한 절대주의자였는지 아니면 야만적이긴 했지만 법 내에 머무르기 위하여 상당히 애썼던 입헌군주였는지는 역사적 논란이 있는 문제이다. 이것이 아무리 학술적 첨단의 문제처럼 들리더라도, 영국만이 16세기부터 등장하는 유럽열강들 중에서 대표제도가 손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양된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에, 그 구분은 중요한 것이다. 국가를 장미전쟁으로 빠뜨렸던 대토지귀족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헨리8세는 의도적으로 시골의 약소 젠트리와 도시 및 자치구의 무역상들과 소매상인들의 힘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기보다는 의원수를 늘리고 그 명패, 특히 헨리적인 종교적 개혁”(즉 가톨릭 수도원의 몰수)의 열광이 고조되었던 하원의 명패에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쌓아넣었다. 1558년에 왕위를 계승한 엘리자베스 1세는 정치적으로 그녀의 아버지만큼 능숙하지 못했고 종종 의회와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1588년에 스페인의 아르마다에 승리를 거둔 덕분에, 그런 고충들은 잊혀졌고 따라서 여왕은 강한 성격과 용기를 통해서 영국 인민에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영국 국왕의 전형적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에 대한 영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던 시기인 17세기에 들어갈 때 이야기는 변하기 시작한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를 계승한 제임스 1세는 튜더 가문이 아니라 신민의 동의가 있든 없든 국왕의 통치권은 신성하다는 대륙의 사상에 기울어 있던 스튜어트 가문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가문의 구성원이었다. 그럼에도 제임스는 지방의 감수성을 존중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1625년 그를 계승한 그의 아들 찰스는 그렇지 않았다. 찰스는 1629년부터 의회를 해산했고 10년 이상 동안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려고 시도했다. 대체로 중첩되는 범주인, 의회의 청교도 의원들과 보통법으로 단련된 사람들은 분노했고, 마치 미국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을 해산시키고 이제부터 자신이 단독으로 헌법을 해석할 것이라고 선언한 듯 했다. 찰스의 대외정책이 실패하기 시작하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체제를 파산 직전까지 몰고갔을 때 청교도의 가장 깊은 신념들이 확증되었다.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영국은 가톨릭국가인 스페인의 침공을 물리쳤다. 그러나 지금 찰스가 오랜 시대에 걸친 의회와 국왕의 권력균형을 손상시키고 난 후, 자유는 위태로워졌고, 애국적인 개신교 종교는 후퇴했고 따라서 영국의 국운은 이지러지고 있었다. 고대의 헌법이 침해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가장 영광스러웠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이 일을 바로잡는 열쇠였다. 1641년이 되면 왕정복고주의자들과 청교도인 의회지지자들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은 너무나 낡아빠진 것처럼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보일 수 있겠지만, 극단적으로 낡은 미국 헌법은 이 모든 사건들을 너무나 적절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1607년에 시작된 제임스타운 식민지는 엄격히 말하면 상업적 기획이었지만, 2-30년 후의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는 깊어지는 헌법적 위기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청교도의 대탈출은 찰스가 의회를 해산하던 시기 즈음에 시작되었고, 내전이 임박했고 따라서 의회적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서 청교도 투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던 바로 그 순간 멈추었다. 많은 매사추세츠 남성들은 실제로 국왕과 싸우기 위하여 영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마치 호박 속에 갇히기라도 한 듯이, 거대한 대결을 촉발했던 그 시대의 특징인 정치적 신념들그 뒤에 이어진 신념들이 아니라을 보전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것은 거의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이민자들은 항상 그들이 남기고 떠난 사회의 사상들과 이미지들을 얼어붙게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 관하여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고국에서의 그 신념체계가 특히 높은 유동상태에 있었던 시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1640년대 영국 혁명은 양쪽으로 동요했다. 그것은 국왕을 전복했을 뿐 아니라 전복했던 사람들의 신념들도 전복해 버렸다. 1644년부터 의회군의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를 이 왕국의 근본적 헌법들에 반하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나 일단 그가 찰스를 참수한 다음에는 그는 의회의 양원을 모두 해산하고 찰스가 구상했던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엄중한 군사독재를 부과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고대의 권력균형을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현대적 중앙집권국가에 가까운 어떤 것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1658년 크롬웰의 사망과 1660년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에 고대 헌법은 다시 한 번 상승했고, 그 오래된 견제와 균형, 권력분립 등의 사상이, 또 하나의 스튜어트 절대주의자인 제임스 2세에 대항하여 의회가 반기를 들었던 1688-89년의 명예혁명의 시대 즈음에 특별한 명망을 누렸다. 그러나 오래된 형태의 정부의 승리는 단지 일시적인 것이었다. 영국인들은 고대의 헌법을 대좌에 다시 올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권력을 국왕의 명령으로 행동하는 의회 지도자들의 수중에 집중시키게 될 헌법적 근대화의 길고도 단속적인 과정에 착수하고 있었다. 영국의 지도자들이 고대헌법을, 그리고 그와 함께 가는 견제와 균형을 상찬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것을 더 많이 위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령 북미에는 들어맞지 않았다. 역사가인 루이스 나미에르 경이 한 때 언급했듯이 영국 역사에 독특한 것의 많은 부분은 대영제국이 섬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의 헌법적 발전에 독특한 것의 많은 부분은 미국이 대륙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오래된 형태의 정부들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 모든 훌륭한 영국 애국자들의 의무라는 사상은, 살아남기 위하여 정부가 신속하게 적응해야 했던 18세기의 다사다난한 영국 권력정치의 와중에서는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신세계에서는 덜 비현실적이었다. 캐나다에 있는 프랑스인들과 서부 국경선을 따라 산재해 있던 인디언들을 제외하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중앙집권화된 정부, 대규모의 관료제, 또는 고비용의 상비군은 거의 필요가 없었다. 농업, 해운업, 그리고 산재해 있는 수공예공장들에 근거를 둔 다양한 중산계급경제가 있었기에, 그들은 은행, 대규모의 투자 또는 기타 형태의 대형금융기관도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구 영국의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옛날 영국의 헌법 사상들을 가지고도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다. 고대 헌법이 암시했던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정부도 그들의 요구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 결과는 그들이 17세기 초에 남기고 떠났던 신 중세 시스템보다 훨씬 더 다원주의적인 정치구조였다. 영국의 새로운 서쪽 지방은 각각 자체의 지사, 양원제 입법부와 임시의 법원 시스템을 갖고 있는 13개의 별도 식민지들”(plantations)로 나누어졌다. 식민지들은 18세기 중반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너그러운 방치 정책 덕분에 런던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반면, 뉴잉글랜드 바깥에서는 지방공동체들이 그들 자신의 식민정부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관료주의는 하잘것없었고, 사법법원은 1년에 15-30일 정도만 모였던 반면에 입법부는 12달 중 1달 남짓 동안 드물게 회기를 열었다. 그에 따른 법적 구조는 영국 보통법, 의회법과 지방의회가 만든 법률의 뒤범벅이었고, 주지사들이 불평하듯이 그것들을 다 합쳐봐야 모든 사람이 그들의 진짜 권리가 어디에 있는지에 관하여 완전히 혼란스럽도록 버려두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더욱이 식민정부가 나누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들도 정태적이고 낡은 것이었다. 영국 의회가 대담하게 전인미답의 땅으로 움직여들어가고 있던 반면, 식민지 입법부들은 여전히 입법부의 일은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법 원리들이 변화하는 상황에 비추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오래된 법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신중세적 믿음에 매달려 있었다. 따라서 아직도 스스로를 법원”(court)이라고 부르던 매사추세츠 식민지의회는 1761년까지도 그것이 통과시킨 세 개의 법률안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기존 법률의 확장이라고 설명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새로운 법은 의심스러운 반면 오래된 법은 건전하고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뉴잉글랜드는 옛 영국이, 새롭게 가구를 배치하고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여성들과 새로운 남성들이 배치된 채 건재한 곳이라고 작자 미상의 17세기 민요가 선언했다. 뉴잉글랜드는 고대의 방법들에 더 충실했기 때문에 옛 영국보다 더 나았다. 버지니아의 정치문화는 많은 측면에서 뉴잉글랜드의 그것과는 정반대였지만, 거기서 나타난 결과들은 훨씬 더 보수적이고 독재적(autarchic)이었다. 적어도 매사추세츠가 일정한 형태의 정부를 믿었던 반면 버지니아의 왕정주의적 젠트리는 그들 자신의 땅에서 간섭받지 않고, 크롬웰이 그토록 무례하게 저지했던 영국의 농촌생활을 재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버지니아는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인 사회였고 그 언어조차도 오래된 것이어서, bide(“bide awhile”[잠시 기다리다]에서처럼), howdy, craw(“throat”), tarry, tate, passel, woebegonegrit(“courage”) 등의 단어들이 영국 시골에서는 사라진지 오래 후에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버지니아사람들은 그런 낡은 태도에 대해 대가를 치른 것이 아니라 영국령 북미인들 일반과 마찬가지로 번성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인들이 부상하는 휘그파 귀족정이 그들에게서 점점 더 많은 고래의 자유들을 강탈해가도록 허용하고 있었던 반면에, 미국에 있는 그들의 사촌들은 고대 헌법에 충실하게 남아있는 것의 혜택을 수확하고 있었다.

이것이 미국을 앞서 말했던 국가당을 위한 그토록 행복한 사냥터로 만든 것이다. 돈 있는 내부자들, 고위 휘그파, 그리고 왕실의 한직과 이득으로 살쪘던 의회의 평의원들로 구성된 궁정(Court Party)과는 대조적으로, 17세기 후반이래의 국가당(Country Party), 런던의 소음과 불결함에 역겨워진 산간벽지의 시골 대지주들, 부패와 금융 사기의 성장에 분노한 도시의 소매상인들, 영국국교회의 위선을 참을 수 없었던 종교적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 등 권력의 중심에서 차단되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국가당은 많은 방식에서 두 당 중에 더 우월했다. 그것은 더 지적이었고 더 고매했으며 아마도 훨씬 더 도덕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더 반동적이기도 했다. 역사가 J.G.A. 포콕이 볼링브로크 자작 등 그런 국가당의 유명인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 “그들의 언어는 인간적이었고 그들의 적은 근대성이었으며 그들의 자세는 그것에 관한 16세기의 무언가와 20세기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부패, 대형금융기관과 정치적 집중화의 성장에 대한 국가당의 답변은 항상 똑같았다. 고대 헌법을 다시 도입하라, 권력을 수상내각이라고 알려진 한 줌의 패거리들 집단의 수중에 집중하는 유해한 근대적 관행을 제거하라, 그리고 유서깊은 입법, 사법, 집행 기능의 분리로 돌아가라. 의회는 그 독립성을 빈틈없이 방어해야 한다. 그것은 왕권에 대한 견제로서 기능해야 하며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의회는 국왕은 집행에 집중하라고 주장하면서 입법기능에 집중해야 한다. 행성들이 그들의 적절한 궤도로 돌아갈 때에만 질병들과 전조들이 더 이상 국가들의 통합 그리고 그와 결합된 평온을 해치지 않게 된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들이 미국인의 태도를 틀지웠다. 그 믿음들은 또한 영국 정치가 정치권력의 본성에 관한 미국인들의 최악의 두려움을 확인하는 듯한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기 시작했을 때 수십년 동안의 증대하는 정치적 갈등을 위한 무대를 설치했다. 1714년 앤 여왕의 사후에 의회는 왕위 계승을 위하여, 독일의 하노버 공국으로부터 믿을만할 정도로 개신교도인 통치자를 수입했다. 그러나 새로운 왕 조지 1세가 영어를 하지 못했고 그의 새 통치가 시작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일상의 통치를 처음에 그를 고용한 의회 지도자들에게 양도했다. 권력은 점점 더 로버트 월폴이라는 이름의 하원의 휘그파 지도자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그는 1721년 남해거품의 붕괴에 뒤이은 재정적 혼란을 청소할 책임을 졌던 인물이었다. 재무장관으로서 영국 재정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에 월폴은 정부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도 비밀리에 비자금을 이용함으로써 그는 20년 이상 동안 의회의 굳건한 지지층을 양성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했다. 영국의 지식인들은 그를 부패의 대명사(the very soul)로 여겼지만, 월폴은 그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 나갔다. 국왕이 명목상으로는 통치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월폴과 강력한 휘그파 거물들의 집단이 통치하게 되었다.

결말은 영국 최초의 의회정부였는데, 그것은 권력분립이 아니라 입법, 집행 및 사법 기능의 통합에 근거를 둔 정부였다. 국가당 반대파들은 재앙을 점쳤지만, 새로운 장치의 효율성은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명백했다. 해협 건너편[프랑스를 가리킴옮긴이]에서는 루이16세 치하에서 파산을 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던 [프랑스옮긴이]각료들은 유산계급을 소외시키거나 농민봉기를 촉발하지 않은 채 돈을 빌리고 세금을 올리는 영국의 능력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구질서가 정치적 분열(disunity)로부터 미덕을 만들었던 반면, 새로운 질서는 놀랄만한 한결같음으로 전진해 나갔다.

이것은 세계의 전복이었다. 그러나 정치의식의 지체 덕분에, 궁정당의 성공은 국가당 이데올로기의 성장을 한층 더 자극했다. 한 역사가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당 반대파들의 언어는 이제 전원의 주들(shires) 출신의 평의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속이 상한 관리들과 조신들, 정부 채권 보유자들 그리고 잉글랜드은행 및 주요 무역 회사들의 경영자들에 의해서도즉 새로운 권력구조에 의해 쫓겨나거나 새로운 사업운영방식에 의해 밀려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당이 적절했던 모든 사람들이 반대파들이었다. 그것의 순전히 부정적인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권력을 행사하기보다는 권력을 비판하기에 훨씬 더 좋게 만들었다. 에컨대 볼링브로크는 월폴의 변화를 완전히(in toto) 거부했다. 그 변화들이 아무리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볼링브로크는 우리 헌법과 같은 헌법에서는 전체의 안전이 그 부분들의 균형에 달려있기 때문에영국의 전통적인 정부형태를 단 한 치(just one iota)라도 바꾸는 것은 위험하게 오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헌법의 모든 최후의 특징은 전체로서의 그 구조가 원래 의도되었던 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제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정부가 그 대신 무슨 일을 하도록 만들 것인가에 관하여 압력을 받았을 때, 볼링브로크는 그저, “그 많은 수 세기동안의 노동에 의하여 고양되었고,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보수되었으며, 그토록 많은 피에 의해 강화된, 그렇게 고결한 구조, 영국의 자랑, 그 이웃의 부러움이라는 고대 헌법에 대한 한층 더 과장된 축복들이들과 같은 토로들이 실제 정책에 대한 어떤 대체물이라도 되는 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방당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그것이 영국의 고대 헌법을 찬양하면 할수록, 그것은 당대의 현실적 문제들에 관해서는 점점더 부적절해졌다. 그러나 사실상 전 나라가 런던의 새로운 권력 중심에서 소외되었다고 느꼈던 미국에서는 정치적 공감대(chemistry)가 달랐다. 국가당 이데올로기의 모순들이 덜 명백했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고조된 열정으로 그것을 포용했다. 국가당 반대파가 말한 모든 것을 미국인들이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되어 왔다. “카토의 편지들로 알려진 선정적인 국가당 공격 시리즈의 저자들인 존 트레차드와 토머스 고든은 뉴잉글랜드 이외에는 미국인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반대했던 어떤 것이었던 고밀도의 도시 발전의 미덕을 찬양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카토가 집중된 권력과 자유는 영원히 불화하기 때문에 새로운 중앙집권화된 형태의 정부는 점점 더 위험해진다고 경고했을 때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트렌차드와 고든은 정치권력은 불(fire)과 같이 그것이 주목되고, 도발되거나 증가됨에 따라서 따뜻해지고 타거나 파괴된다.”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정치권력의 경향을 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반드시 다음과 같이 하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매우 제한되고 상이한 통로들로 매우 나누어지고 관심과 견해가 다른 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재량에 할당되어서, 그들 대다수가 거의 혹은 결코 근본적 사례들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는 데서 이득을 볼 수가 없도록 하는 것. 그들의 경쟁, 질시, 두려움 또는 이익이 항상 그들을 서로에 대한 염탐이나 견제 장치로 [만들어야 한다].

 

정치권력은 그것이 가할지도 모를 손해를 제한하기 위하여 세분화되어야(fragmented) 한다이와 같은 주장들이 미국인들에게 꼭 맞다. 미국인들은, 그들이 자유롭다면 그것은 그들의 거의 과장하다시피 다원주의적인 정부 체계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식민지인들의 깊은 믿음을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영국이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은 권력이 점점 더 단일한 지배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어야 했다.

1720년대에 발간된 카토의 편지들은 보스턴에서 찰스턴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역사가 버나드 베일린에 따르면 독립적인 문제들이 끊임없이 재인쇄되었고 모든 식민지에서 모든 가능한 맥락에서 언급되고 인용되었다. 1730년대의 [존 피터] 젱거의 <뉴욕주간잡지>(New York Weekly Journal)는 이러한 비정상적으로 인기있던 글들을 진실하게 엄선한 것이었다.” 볼링브로크 역시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토머스 제퍼슨은 그의 저작의 긴 발췌문을 자신의 개인공책에 복제했지만, 존 아담스는 나중에 그가 모든 신사의 도서관(gentleman's library)에 소속되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었던 것은 1729년 런던을 방문한 뒤에 저술된 책, 즉 영국을 고전적 국가당 색깔로 물들였던 법의 정신의 저자인 몽테스키외 남작이었던 것 같다. 많은 꿈꾸는 듯한 눈을 가진 동료 여행가들처럼, 볼링브로크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귀족정 집단에서 행동했던 몽테스키외는 영국 정부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가 그랬으면 하는 방식에 따라 묘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정부의 작동에 매우 낯설었던 미국인들은 방문객인 프랑스인의 말에 의존해야 했고, 그의 모든 말을 다 복음으로 여겼다. 몽테스키외가 1720년대에 영국 정부의 작동방식으로 추정된다고 묘사했던 것으로부터 영국정부가 더 벗어날수록, 미국인들은 더욱더 영국정부가 폭정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믿었다.

1776년으로 이르게 했던 사건들은 정부는 고대의 자유를 보전(conserve)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믿는 헌법이론과, 정부는 당대의 요구에 자유롭게 적응해야 한다고 믿는 헌법이론 사이의 충돌이었다. 미국에서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라고 알려진, 1756-1763년까지의 7년 전쟁이 전환점이었다. 미국인들이 그 전쟁에 대한 그들의 기여를 자랑스러워했던 반면 영국 당국은 식민지인들이 마치 어떤 고래의 헌법적 권리인 양 세금 납부를 망설이고 적과 무역을 계속하는 방식에 깜짝 놀랐다. “이 나라의 모든 부분에서 서비스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마주치는 지연들은 엄청나다고 북미의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루든 경(Lord Loudon)은 런던에 있는 그의 상관에게 편지를 썼다. “헌금과 서비스 대신에,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해가 행해진다.” 미국인들이 특히 캐나다로부터 프랑스인들이 축출됨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행태를 영국 지배계급의 눈에 이중으로 난폭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런던은 미국인들이 규칙에 따르도록 만들기로 결의했다.

 

그 결말은 양측 모두에서 정치적 경화(hardening)였다. 미국인들이 과거에는 착한 아들들이었지만 그들은 이제 방치된 양자같이 느꼈다. 의회는 1763년부터 시작해서 미국인들의 앞길에 잇달아 방해물을 놓았다. 런던은 미국인들이 오하이오 계곡에 있는 인디언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런던은 그들에게 서인도제도의 영국 재배자들에 이익을 주기 위한 목적의 설탕세를 납부할 것을 요구했다. 런던은 식민지인들에게 서부 토지들을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에게 양도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1765년에는 미국민들이 지방의회를 통하여 스스로 과세할 수 있도록 하는 옛날 관습에 직접적으로 위반되는 우편세를 부과했다. 1767년에 통과된 타운센드 법(the Townshend Act)은 미국인들에게 납, 유리, 페인트, 종이 및 차에 대하여 영국 제조업자들의 이익이 되도록 수입관세를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략 영국 인구의 25%를 구성했지만, 그들의 이익은 프랑스 가톨릭, 카리브해의 농장주들, 그리고 동인도회사의 차 상인들 다음 순서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착취하기 위한 자원이었다.

런던 정치의 본성이 그들의 깊어가는 소외감에 불을 붙였다. 일부 측면에서는 근대적이었지만 영국 정부는 여전히 다른 측면에서는 대체로 화려한 고풍스러움을 유지했다. 의회는 엘리자베스 시대이래로 선거구변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쪽의 반쯤은 버려진 부패선거구들”(rotten boroughs)은 계속해서 의회구성원들을 선출했던 반면 북부의 맨체스터처럼 새롭게 싹트는 대도시들은 그렇지 못했다. “사실상의 대표이론 덕분에 의원들은 그들 선거구민뿐만 아니라 전체로서 제국을 대표한다고 추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방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그 업무라고 보는, 신엘리자베스적 입법자 개념에 매달려있던 미국인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동시에 미국인들은 런던의 부패와 거래(deal making)의 일반적 분위기가 아주 역겨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민지인들이 정직, 검소함과 다른 무엇보다도 자립(self-reliancce)을 존중했던 반면, 궁정당은 의회의 지지자들에게 보상하여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무한히 공급되는 듯이 보이는 하는 일 없는 왕실의 일자리를 이용하였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오래된 부패는 정부의 바퀴들이 계속 움직이도록 하는 윤활유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치적 서비스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바퀴는 윤활유칠을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배제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만약 미국인들이 런던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카리브해의 부유한 농장주들, 즉 그 나라의 사유지들, 그리고 사유지에 딸려나왔던 입법부의석을 구매했고, 지금은 의회에서 가공할만한 서인도 이익단체를 구성한 그 농장주들을 모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진지한 제안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부유한 사람들도 열등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될 장소로, 도대체 어떤 미국인이 이동하고 싶을 것인가? 해외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은 자신의 사상이 옆길로 새서 모든 사람이 자유보유자이고 공적 사무에서 투표권을 가지며 온화하고 따듯한 집에서 살고, 풍부한 좋은 음식과 연료를 가지는 뉴잉글랜드의 행복으로 다시 떠올리는 걸 발견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일 뿐만 아니라 다른 생활방식이기도 했다. 그것은 모국(home)이었다.

 

독립선언문은 산뜻하게 미국적 생각을 요약했다. 국가당 이데올로기의 인간주의적 측면을 보전함으로써 그 시작 구절들은 고결하고 합리주의적이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독립선언문은 천명했다. “[그들]은 창조주에 의해 일정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받았, 그 중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추구가 있다.” 정부가 그 권위를 피지배자들의 동의로부터끌어낸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가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게 될 때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경하거나 폐지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였다.

이것은 ㅌ장 보댕이나 토머스 홉즈 같은 16-17세기 이론가들의 저작에서 맹아 형태로 존재했지만 이제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고 있던 하나의 사상, 즉 인민주권이라는 매우 최신의(au courant) 관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것이 왜 기존의 정부가 폐지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할 때, 선언은 태도를 바꾸었다(shifted gears). 조지 3세와 의회 양자 모두에 대한 그것의 주요한 불만은 그들이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헌법적 한계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그 문서는 국왕이 1707년 이래 의회의 행위를 거부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3세가 식민지의 입법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다.

 

그는 공공선을 위하여 가장 유익하고 필요한 법률들에 대해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원이 인민의 권리들에 대한 그의 침범에 대해 단호하고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하원을 되풀이해서 해산했다. 그는 사법부 권력(judiciary powers)을 확립하기 위한 법률에 동의를 거부함으로써 사법(Administration of Justice)을 방해했다.

 

달리 말하자면 미국인들의 신엘리자베스적 이데올로기가 모든 그런 통치 제도들은 동등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조지는 식민지 입법부들(legislatures)[영국]의회(parliament)에 종속시켰던 것이다. 선언문은 계속해서, 권력분립의 침해는 또한 다른 남용들로도 이어졌다고 했다.

 

그는 법관들이 오로지 그의 의지에만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 입법부의 동의 없이, 우리 가운데에, 평화시에, 상비군을 유지했다. 그는 수많은 새로운 직책들을 창설했고, 그 자리에 우리의 인민을 괴롭히고 그들의 재산을 먹어치울 수많은 관리들을 보냈다.

 

애국자 왕이 과도한 권한을 가진 입법부에 제동을 걺으로써 헌법적 균형을 보전하도록 하기 위한, 25년 전 볼링브로크의 탄원에 공명하면서, 독립선언문은 마침내 우리 헌법에는 이질적인 관할권을 가진의회를 억제하지 못했다고 국왕을 비난했다. 의회는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동의없이 세금을 부과했고, 대외무역에 종사할 그들의 능력을 제약했다. 그것[의회옮긴이]우리의 헌장들을 빼앗아갔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법률들을 폐지했으며, 우리 정부의 형태들을 근본적으로 변경해버렸다. 그러나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의회로 하여금 그 전통적 역할로 되돌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은 국왕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켜하지 않는 미국의 식민지인들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데 공모했다. 미국인들에게서 그 고래의 자유들을 박탈하려고 공모함으로써, 조지 3세는 국왕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 즉 폭정(tyranny)에 대해 유죄였다.

 

 

.자유를 보전하기 위하여 식민지인들은 신세계의 물질들에서 고대헌법을 재창조해야 할 것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선택은 독립해서 적절한 헌법적 균형을 자력으로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회와 국왕은 미국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집행 및 사법부를 그들의 원래 궤도로 되돌아가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국가당 이데올로기는 부패와 폭정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헌법적 권력균형이 회복되도록 입법, 통상적으로. 독립선언문은 국왕 조지를 식민지 입법부를 거부하는 반면 영국의회를 거부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함으로써 너무 많은 것을 하기도 했고 너무 적게 일하기도 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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