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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법과 예술

박홍규 교수님의 법과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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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법과 문학

제1장 고대 문학

1. 호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이 책에서는 앞서 <서론>에서 설명했듯이 안경환 교수가 다룬 많은 걸작들을 다루지 않았다. 예컨대 호머Homer(기원전 8세기경)의 『일리아드Iliad』나 괴테Johann Wolfgang Goethe(1749-1832)의 『파우스트』를 하나의 장으로 다루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법과 문학>의 범주에 꼭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먼저 그리스 문학의 고전이자 세계문학의 가장 오랜 고전인 『일리아드Iliad』를 잠깐 살펴보자. 기원전 8세기경에 쓰여진 그것은 재판을 묘사한 문헌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재판 장면을 번역서에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쪽에선 사람들이 몰려 있다. 싸움이 있는 것이다. 두 남자가 시체를 두고 다투고 있다. 한편이 완전한 보상을 하겠다고 사람들에게 소리치면 다른 편에선 아무것도 안 받겠다고 우겨, 둘은 판결을 위해 심판관에게 호소하겠다고 하고 있다. 군중들은 양편을 다 들어 응원한다. 전령들이 이들을 진정시킨다. 다듬어 놓은 돌 위에 앉은 노인들이 자리에서 일어설 때 지팡이가 쥐여진다. 한 가운데 두 개의 금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은 가장 정당한 판결을 내린 사람의 몫이다.
(각주: 김병익 역, 삼성출판사, 1976, 191-192쪽)
  
위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원래는 두 남자 중 한쪽이 보상은 끝났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나아가 쌍방은 중재자의 중재에 의한 해결을 희망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재판관인 장로들(위의 번역문은 노인이라고 하고 그들이 그냥 일어선다고 하여 재판관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게 한다)의 재판 모습이 형편없이 생략되어 있다. 위의 인용에서 <전령들이 이들을 진정시킨다> 뒤에 이어지는 원문을 보자.

장로들은 원형으로 설치된 신성한 곳에서 다듬은 돌 위에 앉아, 소리치는 전령으로부터 지팡이를 건네받아 손에 쥔다. 지팡이를 손에 쥐고 한 사람씩 일어나서 차례로 자신의 결정을 말한다. 그곳 한 가운데 황금 2폰드가 놓여져 있는데, 그것은 가장 정당한 결정을 내린 사람의 몫이다.

위 서술은 이미 복수의 시대가 끝나고 속죄의 뜻으로 보상금이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재가 임의적인 중재인지, 재판에 의한 중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추리는 다음과 같다. 즉 원고는 자력구제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피고를 체포하여 보상금을 지불받지 못하면 피고를 죽여 복수를 할 수도 있었다. 피고는 그런 자력구제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여 관헌에 출두했다. 보상금을 지불했다고 하는 자기 주장의 진위를 가려주기까지 그는 장로들에게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시작된 사적 집행에 간섭할 정도의 힘을 가진 관청이 실재했다. 이는 민중을 제지하는 전령에 의해 증명된다. 관헌이 왕이었는지는 모르나 그가 재판에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여하튼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위에서 본 호머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재판 광경과 달리 최소한의 형식과 권위를 갖춘 법원에 의한 공정한 절차의 재판은 아이스킬로스Aeschylos(B.C. 525-456)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Oresteia Trilogy』(B.C. 458)에서 비로소 볼 수 있다. 이야기는 어느 집안 형제간의 대를 물린 복수담이다. 거듭된 복수의 마지막에 오레스테스가 재판을 받는다. 여신 아테나는 12명의 시민을 배심원으로 선임하고 법원을 개설한다. 복수의 여신이 검사로 준엄한 논고를 내리고, 피고인을 아폴로가 변호사로 변론한다. 배심의 평결은 6대 6이었으나, 아테나가 결정표를 던져 피고인은 무죄로 석방된다.  

아이스킬로스를 잇는 소포클레스Sophocles(B.C. 496-406)는『안티고네Antigone』에서 악법에 저항하는 저항권과 자연법을 표현한다. 반역자의 시체를 들판에 버리라고 명령한 왕에 대해 반역자의 누이동생인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이 <신의 법>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죽는다.

2. 플라톤

철학자가 대통령이 되면 만사형통이다?


플라톤은 그 옛날 철인정치를 제창하였거니와 우리 대통령이야말로 철인 정치의 표본이다. 일찍이 역사상 보기 드문 철학자요 예언가임을 우리는 그의 탁월한 리더십에서 역력히 찾아 볼 수 있다.

위 글은 1970년대 초 소위 유신시대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교수 9명이 집필하여 대량으로 배포한 책 『민족의 등불』에 나오는 것이다. 바로 친일과 변절, 쿠데타와 독재로 <민족의 암흑>을 초래한 박정희에 대한 찬가이다. 그런 그를 철인이라고 했으니 철학과 출신의 김영삼은 그들이 보기에 진짜 철인일 수밖에 없다.

정말이다. 내가 아는 어떤 서양 철학자는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숭상한 탓으로 철학자가 대통령이 되면 완벽한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믿어 철학과 출신인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되기를 고대하다가 마침내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자 이제 철학자의 세상이 왔다고 너무나도 기뻐했다. 그는 철학자인 안호상 씨가 이승만 밑에서 장관을 지내고, 박종홍 씨가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특보를 지내며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 것에 대해서도 무한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그가 이승만 씨, 박정희 씨 그리고 김영삼 씨를 찬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두환 씨와 노태우 씨가 철학을 공부했더라면 역시 그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 철학자에게 그들의 문제는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탓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대학 내에서 더욱 극심하다. 대학에서 총장을 직선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일부 교수들은 자기 전공이나 자기가 속한 단과대학 중심으로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최근 인문학 위기론이 나오면서 일부 인문대학 교수들은 그 출신을 총장으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다. 심지어 내가 속한 법과대학에서 영어나 국어를 법률영어 또는 법률문장론으로 바꾸어 법과대학 교수들이 강의하고자 하면, 법과대학 교수들은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안된다고 주장하는 인문대학 교수들도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는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철학과, 사학과, 국문과, 각종 외국문학과 등의 인문학과들이 설치되어 있다. 학문의 대종이기에 반드시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런 학과의 졸업생들은 그 전공과목을 살리기는커녕 전공과 관계없는 일에 종사한다. 그래서 대학에 다니면서 취업을 위한 별도의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도 시중의 비싼 학원 등을 다니면서.

그런데 외국의 대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미국의 4천여 개 대학 중에 이런 인문학과를 두고 있는 대학은 몇 백 개도 되지 않는다. 그런 곳을 졸업해야 취직이 안된다는 알기에 학생들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나 입시경쟁이 치열하고 학과 정원이 있으므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은 울며겨자먹기로 인문학과에 입학하여 그곳을 졸업해야 한다.

이 모든 현상에 대해 플라톤과 그 스승인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가 원흉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소크라테스는 그 수제자인 플라톤과 함께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그런 주장을 해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있으니 법적으로야 무방할 것이나, 사회적으로는 비판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독재가 죽어도 싫은 나 같은 사람은 설령 소크라테스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싫다. 나는 김영삼 씨도 박종홍 씨도 싫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더욱 싫다. 아니 싫고 좋고가 아니라 말도 안된다. 그런 2400년 전의 그리스에서 그랬다면 어떨까? 만일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상식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바로 소크라테스 시대에 소크라테스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매우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소크라테스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 민주주의를 변명하고자 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소크라테스와 결별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아버지로 섬기는 철학과 결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또한 소크라테스를 죽인 그리스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그 민주주의를 신봉한 그리스 사람들을 변호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왜 그리스인가?

나는 내가 그리스인을 변호해야 하는 점에도 내가 왜 이래야 되는지 사실 의문투성이이다. 도대체 그리스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2400년 전의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사실 깜깜하면서 왜 그리스에 매달려야 하는가? 그 옛날 남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왜 알아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지금 우리가 죽어라고 매달려 있는 서양 문화의 원류가 그리스이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서양 문화에 매달려 있는가? 그것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이런 문제는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거창한 것이니 여기서는 덮어두자. 여하튼 분명한 것은 지금 그리스인들은 2400년 전의 한국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2400년 전의 것은커녕 바로 현재의 한국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거의 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문제가 된 소크라테스를 알기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끝내자.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는 흥이 안나니 하나만 더하도록 하자. 그것은 그리스가 우리가 지금 신봉하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그리스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도 그런 민주주의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중의 하나인 아테네 출신이다. 그곳 인구는 기껏 우리의 군 정도에 불과한 25만 명. 그 중에서도 인간 대접을 받는 시민은 약 3만 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면 정도도 아니다. 꽤나 큰 종합대학 정도이다. 그 3만 명의 국민이 사는 면 또는 대학교 정도가 <국가>라니 참으로 우습지만 그렇게 불러주자. 그러나 단순히 우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도 3만 명 정도가 사는 면이나 대학을 국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3만 명이 한달에 한번 정도로 모여 함께 하루 정치를 했다. 2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의회 광장에서.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여의도에 의사당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의도 광장이 의회였다는 것이다. 우리도 3백 명이 아니라 2만 명 정도를 국회의원으로 뽑아 여의도에서 국회를 여는 것이 어떨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모두 바빠서 한번에 모인 사람은 5, 6천명 정도였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집행관들이 동아줄로 묶어 저자에서 노니는 사람들을 소떼처럼 끌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민주주의라고 하기 힘들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게 민주주의였다.

광장 의회에서는 누구나 말할 수 있는데 말을 한 사람은 면세의 특권을 누렸다. 그러니 누구나 말을 하고 싶어 했으리라. 여하튼 의회는 법안 의결, 전쟁 선포, 조약 인준, 공직자에 대한 엄격한 통제, 매년 10명의 군사령관 선출 등 국정에 관한 거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말하자면 우리의 국회와 진배없었다.

한편 행정부는 행정을 하고 싶어 하는 시민 중에서 추첨한 5백 명으로 구성되어 매일 회의를 열어 국사를 처리했다. 임기는 1년. 그 의장은 매일 아침 뽑혔고 의회 의장도 겸했다. 따라서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겸하는 중책의 목숨이 겨우 하루살이였다는 것이고, 5백 명 365명이 모두 그 중책에 앉았다. 그리고 그것은 평생 한번만 할 수 있었다. 당시 평균 수명이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나 50으로 잡으면 18세부터 50세까지 32년간 약 1만2천명이 대통령을 하는 폭이니 3만 명 중에서 반이 그것을 하는 셈이다. 즉 국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니 국민 모두 정치에 신바람이 나지 않았겠는가?

심지어 공무원이나 법관도 누구나 추첨으로 뽑혀 1년씩 근무했고 재선이 불가능했다. 특히 법관은 국민 3만 명 중 6천명에 이르러 5명 중 1명이 판사였다. 4천만 명이 넘는 인구 중에 법관이 1천명 겨우 넘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따라서 국민의 반은 대통령 및 국회의장, 나머지는 공무원과 법관을 하여 거의 전 국민의 공직 출세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무보수 명예직이어서 돈벌이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장 의문이 생긴다. 국민 모두가 그 정도로 똑똑했느냐고 하는. 사실 똑똑했다. 왜냐하면 6세부터 18세까지 매일 학교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년간 군대에 복무했고 60세까지 징집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똑똑한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모두 어느 정도로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빈부격차는 심했지만 물론 지금 우리나라 정도는 아니었고 모두 다 검소하게 살았다.  

더 중요한 문제로는 걱정이 없었느냐, 우리나라처럼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리지는 않았느냐 하는 것도 있겠다. 사실 우리에게 중국이 있었듯이 그리스 옆에는 강대한 페르시아 제국이 있었다. 우리가 중국인을 되놈이라고 욕했듯이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를 욕했다. 결국 전쟁이 터졌다. 우리 군대의 사령관들은 절대로 믿지 않겠지만 10명의 사령관이 매일 번갈아가며 지휘를 맡아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며 전쟁을 해서 크게 이겼다. 그 승전을 알리기 위해 42Km를 3시간 만에 뛴 것이 마라톤의 기원이었다.  

이럭저럭 세월이 흘러 페리클레스가 등장한다. 평생 20회 정도 군사령관을 한 그는 우리의군사독재자들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완성자였다. 시민들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시키고자 공직에 약간의 보수를 지불했다. 그리고 완벽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파르테논 신전 등의 건물이 지어졌고, 세계 문학의 효시를 이루는 그리스 희곡이 쓰여졌으며, 역사와 철학이 꽃피었다. 바로 여기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당시 학문은 우리의 실학자와 비슷한 소피스트들이 장악했는데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30년에 걸친 싸움을 시작한다. 그는 우선 외형이 지극히 못 생겼고 평생 씻지도 않을 정도로 더러웠으며 사시사철 모직 외투를 입고 맨발로 다녔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어떤 철학과 학생이 그렇게 다녔다는데 물론 김영삼 씨는 아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무위도식하며 살았다는 점이었다. 즉 중산층 출신으로서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으로 50세에 결혼한 아내와 세 아들을 부양하면서  평생 돈벌이를 하지 않고 한가롭게 이야기나 하면서 살았다. 그는 사람만나기를 워낙 좋아해서 요사이 자연을 숭상하는 철학자들과는 달리 시골을 싫어했고, 글 한 줄 쓰지 않았다. 그는 서재의 철학자, 책 쓰는 철학자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철학자였는데, 그 중요한 이유는 그가 워낙 게을렀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철학자와 소크라테스가 더욱 다른 점은 그가 유식이 아니라 무식을 자랑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위선자라고 생각했다. 무식을 내세운 유식의 자랑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무식함을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남의 무식함을 폭로하기를 즐겨 누구에게나 질문을 하며 물고 늘어져 지쳐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오늘의 철학자들과 유사한 점도 많으나, 세상일에 철저히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점에서는 도리어 반대였다. 물론 오늘의 철학자 중에도 염세주의자가 있으나, 소크라테스처럼 당대의 정치에 철저히 반대한다기 보다는 정치에는 아예 철저히 무관심하고(소크라테스는 세상일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도리어 학교 보직이나 장관 자리 정도에 연연하는 자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순교자인가?

만일 소크라테스가 사형 당하지 않고 <무죄로 방면되어 평온하게 일생을 마쳤다면, 지금쯤 보잘것없는 아테네의 기인으로 희극 시인들이 즐겨 다룬 인물로나 기억될 지 모른다>고 한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비밀The Trial of Socrates』(1989년)을 쓴 I. F. 스토운Stone이다(각주: 스토운, 소크라테스의 비밀, 편상법, 손병석 역, 자작아카데미, 1996, 20쪽).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사형당했기에 그렇게 불려지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를 지금처럼 대단하게 다루는 데는 문제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정말 <철학의 아버지>라면 사형당해 죽지 않았어도 <철학의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다. 스토운은 소크라테스가 예수처럼 순교하여 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순교했다니 무슨 소리인가? 철학을 위해 죽었다는 것인가? 그래서 그는 <철학의 아버지>라는 것인가?

소크라테스는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제자들 중에서도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 (434?-355?)(각주: 최혁순 역, 소크라테스 회상,  범우사, 1976)만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러나 제자라고 해서 다 스승을 좋아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스승을 찬양했으나 크세노폰은 스승을 비방했다. 따라서 후자의 『회상Memorabilia』만 남았다면 소크라테스는 <평범하고 시시하며 교양이 없는, 심지어 매춘부에게 뚜쟁이 짓을 하겠다고 장난삼아 제의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역사는 우연이 빚어낸 짓궂은 장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라톤이 부지런히, 재미있게 스승을 찬양하지 않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죽음에 대해 쓴 대화는 네 개, 『에우티프론』『변명』『크리톤』『파이돈』이다.  

생전의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자료는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것 외에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들이 있다. 특히 『구름』은 작품 전체가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이다. 그 밖에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하 이 책의 설명은 앞서 인용한 스토운의 책에서 시사 받은 바 크다.  

고발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따라서 지금부터 꼭 2398년 전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다. 당시에는 검찰제도가 없었고, 시민이라면 누구나 고발을 했다. 그러나 고발장은 남아 있지 않다. 어떤 법에 의해 고발되었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발자는 세 사람이었고 사건은 10개의 배심법원 중 하나에 배분되었다. 배심원은 선출된 501명. 그야말로 주권자인 인민의 최고법원이었다.
고발자의 목소리는 크세노폰에 의해 후세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인정하는 신들을 신봉하지 않고 그 대신 새로운 신들을 수입하여 죄를 범하고 있다. 나아가 청년을 타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변명한 것이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소크라테스의 변명』(각주: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박영사, 1974)이란 긴 책으로 전해진다. 우리말 번역으로 66쪽에 걸친 긴 변론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 처음은 다음과 같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께서 저의 고소인들에 의해서 어떤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를 저는 모릅니다. 그건 어쨌든 저는 그들로 인해서 제가 누구인지를 제 자신조차 하마터면 잊어 먹을 뻔했으니, 그런 정도로 그들은 설득력 있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참말이라곤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많은 거짓말 가운데서도, 제가 가장 놀란 것이 하나 있으니, 그건 그들이, 제가 능변하니까 저한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여러분들께서는 조심해야 할 거라고 한 거짓말입니다.>(각주: 위의 책, 8쪽).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언제나처럼 보통으로 말하는 것을 강조했다. <저는 이제 처음으로, 그것도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법정에 출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곳에서의 어법에 관해서는 영락없는 생무지입니다.>(각주: 위의 책, 9쪽).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중상이 <어떤 지혜>때문이라고 말한다(각주: 위의 책, 17쪽). 그리고 그 증인으로 델포이의 신을 내세운다(각주: 위의 책, 18쪽). 그곳의 퓌티아가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각주: 위의 책, 19쪽).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도대체 신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고, 현명하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려고 했다(각주: 위의 책, 20쪽). 그래서 많은 적이 생겼다. 결국 그가 알게 된 것은 신이 말한 것이 <그대들 인간들이여! 그대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즉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지혜에 관해서는 진실로 자신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자가 자금 가장 현명한 자이니라>라는 뜻이었다는 점이다(각주: 위의 책, 24-25쪽).

소크라테스는 배심법원이 분위기에 좌우된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지금 제가 변론을 하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듯, 제 자신을 위해서이기는커녕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즉 여러분께서 제게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여러분께 주어진 신의 선물에 대해 잘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발언이 법정에서 방자한 것으로 들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그는 법원에 자비를 구하는 것도 거부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281표 대 220표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고발자는 사형을 신청했다. 그는 다시 변명할 수 있게 되자 형벌 대신 명예를 요구했다. 그는 투옥, 벌금형, 채무구금, 추방형 어느 것도 거부했다.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소크라테스는 반사회적인 전체주의자였다

이상은 『변명』을 중심으로 살펴 본 것이다. 이제 스토운의 설명에 따라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싫어하게 된 사정을 좀 더 살펴보자. 첫째, 인간 사회를 그리스인은 폴리스라는 <자유 도시>라고 생각했으나, 소크라테스는 <양떼와 같은 집단>으로 보았다는 차이점이다.

폴리스란 <도시> 이상의 것, 곧 독립된 주권 국가를 뜻했는데 여기서 누가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곧 소수의 부자냐, 다수의 빈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 어느 것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아는 자>의 통치였다.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였다. 그러나 이는 동시대인에게 절대왕정에의 복귀를 뜻했으므로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절대왕정에의 복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와 대조된 전체주의 독재국 스파르타를 이상국가로 동경했다. 동시에 그는 20세기까지도 흔히 나타난 전체주의나 독재주의의 선구자였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선출된 통치자는 그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권력과 임기에 제한이 가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제한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사회를 시민의 자치기구가 아니라 목자나 왕을 필요로 하는 무리로 보았다. 반면에 아테네인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을 가지며, 폴리스에서 자치할 수 있는 정치적 동물로 믿었다.

소크라테스와 아테네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번째 견해는 덕과 지식에 대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식은 절대적인 정의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런 지식은 소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수는 양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시민은 철학의 대가일 필요가 없고 이성을 가진 상식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공격에서도 드러난다. 소피스트들은 스스로 지식과 덕의 교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덕은 가르쳐질 수 없으므로 소피스트가 사기꾼이라고 욕했다. 그런 비난으로 소피스트는 그 후 두고두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지식과 덕은 가르쳐질 수 없다고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그의 반민주주의이다. 만약 덕과 지식이 가르쳐지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아는 자>가 통치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순된다. 둘째는 그가 주장한 절대적 확실성의 부정이라는 그의 철학과 관련된다. 셋째는 자신의 제자 중에 악당들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들을 욕한 더욱 기본적인 이유는 소피스트들이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고 심지어 노예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빈민을 멸시했고 노예제도를 긍정했다. 물론 노예제도를 긍정한 자들은 스토아학파, 성 바울, 로마 법률가들, 심지어 대부분의 미국 헌법 기초자들까지 역사적으로 오랜 계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소크라테스 등을 변호할 수 없다. 그들이 적대시한 당대의 소피스트들은 노예제도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과 다른 세 번째는 폴리스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것은 사실 폴리스 없는 인간을 뜻한 것으로서, 이는 그리스인들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영혼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인들은 도시 운영에 참여함은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상징인 솔론은 혁명의 시기나 정치적 투쟁의 시기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을 제정했다. 페리클레스도 그런 주장을 했다. 솔론의 법이 일찍 폐기된 탓으로 소크라테스는 시민권을 박탈당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나이 70이 될 때까지 시민으로서 참여해야 할 일을 거의 하지 않은 반사회적 인간이었다. 그의 생전에 두 차례나 민주주의가 전복된 아테네 역사상 최악의 일이 벌어졌으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그 일과 무관하게 지냈다. 그는 <변명>에서 자신이 그랬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민주주의자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 아테네에서 70세까지 자유를 누렸다. 소크라테스는 70세가 될 때까지 민주주의 아테네에서 반민주주의를 마음껏 설교하며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시민이면 누구나 고발할 수 있었는데 그가 70세가 되기까지 아무도 그를 고발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무슨 사정이 갑자기 생겼는가?

그것은 기원전 411년과 404년에 적국 스파르타와 공모한 불만 세력들이 민주정을 전복시켜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공포정치를 했고, 다시 소크라테스 재판이 있기 2년 전인 401년에 그 세력이 민주정 전복을 기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반민주 책동에 소크라테스의 측근 젊은이들이 주동 돌격대로 가담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었다.  

<악법도 법이다>

<악법도 법이다>란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우리 교과서의 기록은 1995년 삭제되었다.  이에 대해서 강정인 교수의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라는 책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15년간의 각고 끝에 만든 1백 쪽이 넘는 지면을 통하여 열심히 논증하고 있다. 또 소크라테스를 잘못 인용하여 우리나라에서 <악법도 법>이라고 오해하게 만든 우리의 법학, 정치학 및 철학계는 소크라테스의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했는지에 관해 누가 누가 서양사상을 잘 아는가 하는 식의 문헌학적인 논의가, 서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얕은 우리에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강 교수가 <피상적이고 몰지각하며> <척박하다>고까지 조롱한 남한의 전문가들이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여도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못했다는 점을 여기서 변명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악법이나 정치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는 아니다.

정치학을 비롯한 사회과학계도 우리의 악법양산이나 잘못된 보수와 진보의 구별, 또는 정치불참현상에 책임이 있고 그 엄중한 문책이 필요하다. 나는 그러한 논의가 하루 속히 전개되기를 희망한다. 강 교수의 책에도 그러한 문책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본론의 사족처럼 붙어 있어서 아쉽다. 도리어 그 사족이 본론이 되고 소크라테스의 말시비 따위야 사족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악법에 대한 치열한 비판작업 - 그러나 그 소수에 의해 수행되고 있으며 그 반향도 지극히 미약한 - 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귀족주의적 관념론자로서 당시의 민주주의를 비판한 탓으로 처형되었다고 지적했다.

소피스트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철학자들은 누구나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플라톤은 철저히 반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상당히 중립적이었으나 역시 비판적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철학자로서 인정받기는커녕 반도덕적인 변론을 가르치며 돈벌이를 하는 인간들로 매도당했다. 그런 매도는 바로 플라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소피스트가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 활동의 중심은 변론술의 교육이었다. 물론 그들은 현대의 민주주의자들과 같이 민주주의를 이념적인 이상으로 삼아 그 실현을 도모하고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상대주의적 철학에 근거하여 민주주의의 이념을 체현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각주: G. B. Kerferd, The Sophistic Move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그들은 인간의 도덕이란 사회적 관습이라고 생각했다. 정의와 법은 사회의 생성과 함께 발생하고 사회는 그 속에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정한 인간의 행위와 태도에 주어진 이름에 불과하고, 역사와 함께 영원히 변화한다. 따라서 정의 문제의 해결은 사람들 사이의 의견 교환과 변경 및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어떤 개인의 정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발언을 하도록 허용 받고, 모든 의견이 대등하게 존중 받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지도자는 도덕적 우월성을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합의를 형성하는 능력을 요구 받는다. 변론술이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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