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박홍규의 법과 예술

박홍규 교수님의 법과 예술입니다.
이 게시판은 RSS와 엮인글이 가능합니다.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을 쓰실 수 있습니다.
* 광고성 글은 바로 삭제되며,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설립취지에 어긋나는 글은 삭제 또는 다른 게시판으로 이동될 수 있습니다.


제1편 법과 예술 / 1. 법, 법률가, 법학 그리고 예술

민주법연 2004.06.18 21:07 조회 수 : 23944 추천:36

제1편 법과 예술

1. 법, 법률가, 법학 그리고 예술

삶, 그리고 법과 예술


법의 현장은 삶의 드라마다. 법은 메마르고 딱딱하기 그지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다루는 대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뜨거운 희로애락의 삶이다. 물론 우리의 삶은 모두 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삶에는 법과 관련되는 것이 많다. 삶이 복잡해지면서 법이 이리저리 관련된다. 그래서 싫든 좋든 법 없이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법은 이제 삶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법을 안다는 것은 삶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여정의 하나이다.  

법이 구체적으로 문제되는 재판에서도 주로 다루어지는 것은 정작 법이 아니라 삶이다. 곧 사실에 대한 판단이다. 그것이 재판의 99%이고, 그것에 대한 법의 적용은 1%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판과정은 증거능력 있는 증거에 의하여 구체적 사실을 확정(이를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고 한다)하고, 그 구체적 사실이 법에 정한 요건에 부합하는 지를 검토한 다음, 그 요건에 부합하면 법이 정한 법적 효과를 부여한다는 선언을 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 사실을 확정하기 위한 사실 판단이고, 그 사실에 대한 판단은 삶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법을 제대로 알려면 무엇보다도 삶을 알아야 한다.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학도나 법률가는 참으로 한심한 전문가 바보이다. 법학도나 법률가에게는 삶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가 필수적이다. 한편 법학도나 법률가가 아닌 사람들도 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법은 이미 우리 시대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삶의 목표나 가치를 진․선․미라고 한다. 미인대회 탓으로 진이 가장 좋고, 선이 다음이며, 미는 마지막이라는 상식 아닌 상식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실 그런 순위는 잘못된 것이다. 진․선․미에 순서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목표나 가치에 순위가 있을 수 없다. 참된 것을 진실 또는 진리라고 한다. 흔히 그것은 학문의 추구 대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미는 예술의 추구 대상이라고 한다. 한편 윤리와 도덕의 이념이 선이라고 한다.  

윤리와 도덕에서는 선과 악을 구별한다. 곧 선행과 악행의 구별이다. 그 중에 법의 차원에서 문제되는 것은 주로 악행, 특히 범죄와 위법행위이다. 이에 대해서는 법이 가차없는 처벌과 배상을 명령한다. 바로 칼과 같은 역할이다. 그러나 그것들만 법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선․악으로만 판단되지 않는 많은 다툼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다툼의 내용을 따져야 한다. 바로 저울과 같은 역할이다. 그래서 법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은 언제나 칼과 저울을 함께 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법의 이념이 <정의>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단순히 착한 삶이 아니라 옳은 삶을 살고자 한다. 그 옳다는 것이 정의이다. 법의 이념이 정의이나, 법은 항상 정의로운 것만은 아니다. 어떤 법은 정의를 구현하나, 어떤 법은 정의를 구현하지 않는다고 평가된다. 여기서 법이란 실재하는 것이나, 정의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가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요구되는 정의가 있다. 그 기본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인권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도 역시 변하기 마련이다.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무수한 답이 내려졌으나, 그 어느 것이든 정답은 아니다. 칸트Immanuel Kant(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년)(주: 번역본은 여럿 있다.)에서 <법률가는 아직도 법의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고 조롱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법을 정의했는데 역시 정답이 아니다. 그 후 2백년 이상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렇다. 미국의 어느 학자가 말했다. <변호사라도 이 문제에 답할 수 없으리라.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여기서 마지막으로 톨스토이Lev Tolstoy(1828-1910)가 법을 정의한 것을 들어보자. 그는 법을 <조직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립되고, 그것에 반항하는 자를 채찍과 감옥과 사형으로 복종시키는 규칙>이라고 말했다.


법률가 혐오

톨스토이가 말한 <조직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곧 법을 다루는 전문가가 법률가이다. 구체적으로 판․검사 및 변호사를 말한다. 더 넓게는 법학 교수나 법무사, 법원과 검찰의 공무원들도 포함될 수 있다. 그들은 대체로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재판이 법률가들에 의해서 반드시 정의롭게 이루어지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의문이 제기된다.  

  <저주받으리라, 법률가여. 너희는 지식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지고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까지 막았다.> 누가복음 11장 52절에 나오는 예수의 말이다. 이 말을 받아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는 <좋은 법률가는 나쁜 이웃>이라고 했다. 나아가 아놀드 베넷Arnold Benett은 법률가를 <사회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악질적인 적>이라고 매도했다. 키플링Rudyard Kipling(1865-1936)은 <정의의 남용을 조소하며 서술하는 무리들>이라고 분격했다.

<법률가에게도 어린 시절이란 것이 있었을까?>라고 말한 사람은 영국의 수필가 램Charles Lamb(1775-1834)이었다. 그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의 작품을 어린이용으로 풀이한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주: 현기영 역, 창작과비평사, 1981)와 『엘리아 수필Essays of Elia』로 유명하다. 그가 보기에 법률가는 음험하기 짝이 없어 순수한 어린 시절조차 보낸  적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법률가를 혐오한 문학가는 램만이 아니었다. 문학사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그랬다. 특히 램이 아이들을 위해 소개한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그는 <법률가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대사를 남기기도 했다. 바로 『헨리 6세Henry IV』제2부 제4막 제2장에 나오는 말이다(주: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제2편 제2장 참조. 김재남 역, 셰익스피어 전집 제5권, 휘문출판사, 1964, 516쪽).

이는 단순히 문학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서, 1450년의 혁명군이 주장한 것으로 법률가는 난해한 문장으로 증거를 조작하는 엉터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란군 두목은 <아무런 죄도 없는 새끼양의 가죽으로 양지라는 것을 만들어, 그 위에다가 무엇인가를 써 갈기면, 인간이 끝장이 난다는 것은 너무 지독하지 않아?>라고 비난한다. 똑같은 주장이 1786년 미국에서도 다니엘 세이즈Daniel Shays의 반란시에 되풀이 되었고, 실제로 당시의 반란군은 법원을 습격했다(주: 그 상황에 대해서는 하워드 진, 조선혜 역, 미국민중저항사, 제1권, 일월서각, 1986, 115-117쪽 참조).

해럴드 래스키Harold Laski(1893-1950)는 모든 혁명기에 법률가는 잽싸게 그 반대파를 죽이는 사형대로 길 안내를 해주었다고 혁명사를 설명했다. 그래서 법률가가 없는 이상향을 토마스 모어Thomas More(1478-1535)는 『유토피아Utopia』에서 형상화했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법률가를 사실의 위장을 업으로 하는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어 자신은 대법원장이었다(주: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제2편의 제2장의  <사계절의 사나이>,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제3편 제2장 참고).
  
어디 그들뿐인가? 스위프트Jonathan Swift(1667-1745)는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에서 말한다. <돈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수없이 많은 말로 이를 증명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소가 탐나는 사람은 그것을 빼앗기 위해서 변호사를 산다. 소유자가 자기 소를 지키는 확실한 방법은 두 배의 돈으로 상대 변호사를 매수하는 길이다.> 소를 되찾기 위한 소송은 수년이 걸리고 그 동안 법률가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은어를 주고받을 뿐이다.>(주: 스위프트에 대해서는 제3편 제2장 참조).

그 후의 법률가 혐오는 훨씬 심했다. 예컨대 위고Victor Marie Hugo(1802-85)는 <법률가의 껍질을 벗기면 사형집행인이 나타난다>고 했고, 장 발장과 같은 도형수가 입은 붉은 상의는 재판관의 붉은 옷으로 만든 것이라고 비꼬았다. 프랑스의 붉은 법복을 로브라고 하는데 그것은 여성의 드레스라는 뜻도 있어서, 법률가가 로브를 입는 것은 그들이 여성처럼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야유도 있었다(주: 위고에 대해서는 제1편의 <레미제라블> 및 제2편 제4장 참조).

또한 발자크Honoré Balzac(1799-1850)는 법이란 거대한 파리는 뚫고 지나가나 작은 파리는 걸리는 거미줄이라고 말했다. 플로베르Gustave Flaubert(1821-80)는 <재판이란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짓이고, 법률이라고 하는 것만큼 바보같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프랑스Anatole France(1844-1924)는 법률상의 위대한 평등이란 빈민에 대해서와 같이 부자에게도 다리 밑에서 잠자는 것, 거리에서 동냥을 하는 것, 빵을 훔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풍자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변호사 앙리 트레스Henri Tres는 <소변호사에게는 소악당, 대변호사에게는 대악당>이라고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중대한 피고인의 변호사로는 소위 대물 변호사가 몇 명이나 붙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선무죄 무선유죄, 유력무죄 무력유죄 등등이 유행한다. 루소Jean Jacques Rousseau(1712-78)는 대혁명전의 프랑스 사회를 두고 <법은 언제나 있는 사람한테는 유용한 것이고, 없는 사람에게는 해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올리브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는 <법은 가난한 자를 분쇄하고 부유한 자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했다.

법률가에 대한 이러한 저주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19세기 이전에 행해진 것이라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프랑스 혁명 전후의 이야기들이다. 특히 대혁명 이전의 법률가는 만인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그 부패가 심했다. 20세기에 와서는 적어도 서양의 경우, 그러한 저주는 상당히 줄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들의 저주를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재판의 결과는 국민의 생명·재산·지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운용하는 법률가는 고결한 인격과 높은 식견을 가져야 한다. 법률가의 수준이 높으면 재판의 수준도 높아지고, 법률가가 타락하면 재판의 권위도 있을 수 없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법은 질서유지를 위한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정의 등의 사회가치를 포함한 특수한 가치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법에 내재하는 가치를 유지하고, 법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기술을 사용하여 법질서를 실현하는 책임을 지는 법률가는 양적으로 그 적정수가 확보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질적으로도 그러한 책임 완수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법률가는 의사와 성직자와 함께 전통적인 전문직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념적 특징을 갖는 직업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전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고도의 학식과 기술을 습득하여야 한다. 그의 고유한 능력은 개인이 행하는 청구나 공적 기관이 행하는 결정 등의 근거를 명확하게 밝히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권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전문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법률가는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통상적인 직업인의 업무가 그 종사자의 사적 이익의 추구에 있음에 반하여, 법률가의 임무는 의뢰자와의 개별적 관계에서 공공봉사라고 하는 이타주의의 정신에 근거하여 수행하여야 한다. 이타적 공공성이야말로 정의를 실현하는 법률가의 기본적인 직업정신이어야 한다.

셋째, 법률가가 법에 내재하는 가치를 유지하고, 고도의 학식과 기술을 공익을 위하여 충분히 행사하기 위해서는 법률가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는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그 독자의 조직에 의한 자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은 법률가의 자격요건을 정하고, 자격을 인정하며, 법률가와 의뢰자 및 법원과의 관계에 관한 윤리를 정하고, 그 위반자를 징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필자가 이런 책처럼 미술이나 영화 등에 대해 글을 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법률가답지 않은 짓>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옛날 유명한 학자나 정치가는 물론 군인까지도 사상, 역사, 문학이나 미술에 대해 깊은 조예를 지녔다. 사실 그들은 오늘날 문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공부한 교양인이었다. 그들은 교양인으로서 입법을 하고 행정을 했으며 재판을 했다.  

교양인이 아닌 법률가가 생긴 것은 일제 이후였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소위 고등문관시험의 수험자격이 법과대학(당시에는 현재의 정외과나 상경학과를 포함) 출신자에 한정되었다. 그 결과 통치 엘리트층이 교양인이 아닌 법률 전문가로 형성되었다. 그런 일제적 전통은 해방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법학은 학문으로서 무가치한가?

위에서 보았듯이 문학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법률가와 법률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법학에 대해서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즉 법‘학’은 학문이 아니라 기껏 법률을 적용하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법률을 모은 책이 법전이다. 일제 시대에는 그 이름이 육법전서였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려지기도 한다. 발작이나 하이네Heinrich Heine(1797-1856)는 법전을 <악마의 성경>이라고 불렀다.  

법률가나 법과대학 학생들이 성경처럼 모셔야 되는 책이 법전이다. 그런데 그 법전은 자주 바뀐다. 법전의 기본인 헌법은 지난 반세기간 아홉 번이나 개정되었다. 5년에 한번 꼴이다. 다른 법은 더욱 자주 바뀐다. 예컨대 세법은 한해에도 몇 번이나 바뀔 정도이다. 그러면 법전도 바뀌고, 법학서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법학자들은 거의 매년 개정판을 낸다. 덕분에 장사가 잘 된다. 그러나 돈벌이는 될지 모르지만 이게 진리를 탐구한다는 학문이냐에 대해 의문을 낳을 수 있다.

일반인, 특히 예술가들은 법률가 중에서 제일 고약한 사람으로 검사를 꼽는다. 우리나라에서도 검사는 권력의 해바라기니 소총수니 하며 비난을 받아왔다. 그들은 법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다른 어떤 법률가에 못지않다. 그런데 여기 법과 법률가 그리고 법학에 대해서 역사상 가장 신랄한 비판을 한 검사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도 더 전인 1847년, 바로 독일의 킬히만Julius Hermann von Kirchmann이라는 검사가 법률가협회에서 <법학의 학문으로서의 무가치성Die Wertlosigkeit der Jurisprudenz als Wissenschaft>이라는 강연을 했다. 법학의 연구 대상인 법전이 바뀌면 법학도 바뀌니 학문으로서는 무가치하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법이 더욱 자주 바뀌는 지금의 한국에 살았다면 아마도 무가치를 넘어 학문일 수조차 없다고 했을 것이다.  

킬히만은 법을 <병들어 썩은 나무>, 법률가를 <그 나무를 뜯어먹고 사는 해충>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 법을 그는 <자연법>이라고 불렀다. 자연법은 인류와 함께 태어나 성장하고, <그 명백한 판결이 신성하고 불가침의 것으로서 모든 사람의 가슴에 쓰여져 있는> 법을 말한다. 그것은 역사와 함께 변하는 것으로서, <교육, 관습, 노동, 기질의 산물이다>.

이러한 자연법과 대립되는 법을 우리는 실정법이라고 부른다. <실정법은 권력과 형벌로 고정되어 진위에 관계없이 대상에 대해 자신을 강요한다> 이러한 적나라한 자의성, 결함성, 흠결성, 경직성, 추상성으로 인해 실정법은 자연법에 대해 파괴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킬히만은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실정법이 법학에 대해서는 더욱 유해한 영향을 끼쳤다고 탄핵한다. 법학은 법과 마찬가지의 자의성으로 법의 흠결을 보충하고, 추상성을 해소하고자 하나, 그것은 자의성을 더욱 경직된 체계로 만드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킬히만은 법학이 실정법과 달리 <좋은 자연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예외적으로 <좋은 실정법>이 만들어져도 법학은 기교로 가득찬 용어, 개념의 왜곡, 언어의 계산으로 역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법과 법학에 남는 것은 자의성뿐이다. 그래서 소송과 재판은 투기나 의혹, 또는 도박으로 타락한다.

이렇게 그의 결론은 우울하다. 자연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법률가가 아닌 일반 민중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법률가에 그것은 싫고 귀찮은 일이다. 그렇다면 킬히만의 치료법 내지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법은 아주 간단하게 만들고 골치아픈 법학 따위 만들지 말며, 오로지 민중의 건전한 상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엄청난 주장을 한 검사 킬히만은 어떻게 되었는가? 당연히 그는 쫓겨났을 것이라고 짐작될 수 있다. 1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검사는 당연히 쫓겨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20년간 검사로 재직했다. 물론 그는 그런 강연을 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자리를 옮겨야 했으나, 그래도 검사 자리는 유지했다.


그래도 법학은 할 만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킬히만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학문이란 무엇이냐의 문제이다. 법학은 물리학이나 화학 등의 자연과학과 같은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은 아니다. 법학이 대상으로 하는 법에 객관적인 진리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학문이 객관적인 진리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자연과학 외에 그런 분야가 있을까? 예컨대 공학이나 경영학 또는 문학이나 어학에 무슨 객관적인 진리가 있을까? 사실 자연과학도 객관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따라서 객관적인 진리 탐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법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법학이 빵을 위한 학문에 불과하므로 무가치하고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빵을 위한 학문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문자 그대로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 아닐까? 어떤 학문을 하는 사람도 기본적으로는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철학을 하려는 사람도 철학교수가 되거나, 다른 식으로 밥벌이를 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런 이유로 법학을 비난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또한 법학이 출세를 위한 기술이나 권력의 주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학문도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어떤 다른 학문보다도 법학은 권력과 직결되는 것이 사실이나, 권력과 대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법이 국가권력과 직결되는 것은 법 자체의 속성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 독재주의, 전체주의의 요소가 강한 나라에서 그렇다. 그러나 법학만이 권력의 어용인 것은 아니다. 어떤 학문이나 학자나 어용일 수 있다.  

심지어 노벨상에 법학 분야는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법학은 어떤 뛰어난 개인이 무엇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법학에도 그런 업적은 있다. 국제적인 상은 없지만 국내 차원에서는 어느 나라나 법학상이 있고 일반적인 저술상에도 법학책이 뽑힌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법은 무죄인가』(주: 졸저, 개마고원, 1997)라는 책으로 1997년도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여하튼 노벨상에 있는 학문 분야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노벨상이 학문의 척도일 수도 없다.

나는 법학이 학문으로서 가치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논쟁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어느 학문 분야나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학문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논의이다. 나는 특별하게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학문은 나름으로의 역사적 이유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법학은 어떤 학문보다도 역사가 길고, 신학, 철학, 의학과 함께 학문의 대종을 이루어 왔다. 적어도 중세 이래 발전된 대학의 역사에서 그러했다. 특히 르네상스기의 인문학은 법학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법학도는 전인적 인간상의 표본이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법률가들에 의해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이나, 그들은 점점 복잡하고 번잡해지는 사회와 경제활동의 요청에 따라 고대 로마법의 재검토에 착수하여 로마법의 정신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고전 연구에 몰두했다. 이처럼 극히 보수적인 직업 분야가 오히려 휴머니즘의 개혁을 외치는 선구자들의 온상이 되었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로마인들의 그침을 모르는 만능적 재능으로서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을 특징짓게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학문은 상아탑 속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시민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도 로마에서 배운 바가 컸다(주: 존 헤일, 르네상스, 한국일보타임-라이프, 1978, 16쪽).
    
물론 법학에는 문제가 많다. 특히 우리의 법학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학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이다.    


법의 철학과 과학

여기서 법학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 법은 법 독자적인 원리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어떤 가치판단에 의해 생긴다. 그것을 우리는 <법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법철학>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법철학이 <우리나라 법의 철학>이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철학이 그렇듯이 <다른 나라의 법의 철학>이면서도 <모든 나라의 법의 철학>을 가장한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법철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나는 <우리나라 법의 철학>은 자본주의라고 본다. 그런데 왜 자본주의이냐에 대해서는 철저한 논의가 없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인 점에 문제가 있다.

다음 그 가치판단에 의해 인과관계를 갖는 법의 논리가 구성된다. 그것을 우리는 <법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두 가지를 합쳐 법학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후자인 법의 논리적 구성으로서의 과학만을 <법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법학은 사실 법해석학을 대종으로 한다. 법학은 객관적인 과학을 가장하나 사실은 논리라고 하는 법이론 구성의 원리, 곧 법조문의 조작에 의한 해석을 과학으로 혼동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어떤 법에나 철학이 전제된다고 하는 점이다. 따라서 법해석이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고 실천이다. 즉 법학자 자신의 주관적인 주장이다.

나는 법철학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주제의 하나인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법학은 크게 자연법론과 법실증주의라고 하는 두 개의 뿌리를 갖는다. 그 역사는 아주 깊다. 현대 영미법학에 강한 영향을 남긴 자연법론은 법 위에 인간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대륙법학에 강한 영향을 남긴 법실증주의는 법 아래 인간의 삶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자연법의 <자연>이란 <인간 이전의 어떤 질서>를 말하는 것이고, 반면 <실증>이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지, 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근대에는 독일 관념론 철학을 배경으로 한 실증주의가 논리적인 엄밀성에서 자연법론에 우세했으나, 실증주의에 근거한 나치 독일의 과오로 말미암아 제2차대전 이후에는 다시 자연법론이 우세해졌다. 예컨대 우리나라에도 꽤나 열심히 소개된 구스타브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1878-1940)가 그랬다. 물론 전후에도 아무런 반성 없이 철저한 실증주의자로 살다 죽은 칼 슈미트Carl Schmitt(1888-1985)도 있었지만.

해방 후 제정된 우리나라 헌법학과 법철학은 그런 법사상의 변천을 반드시 정확하게 반영한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1960년대 이후에는 자연법적 영향이 인권론 부분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헌법을 제외한 법학에서는 법실증주의가 여전히 강했다. 이는 전후 독일이나 일본에서도 같은 경향으로 나타났다.
* 민주법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7-11 03:3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 제3편 법과 문학 / 제6장 시와 연극 민주법연 2004.12.21 28469
20 제3편 법과 문학 / 제5장 독일 문학 민주법연 2004.12.21 28507
19 제3편 법과 문학 / 제4장 프랑스 문학 민주법연 2004.12.10 29617
18 제3편 법과 문학 / 제3장 러시아 문학 / 2. 톨스토이, 3. 솔제니친 민주법연 2004.11.24 26765
17 제3편 법과 문학 / 제3장 러시아 문학 / 1. 도스토예프스키 민주법연 2004.11.08 27017
16 제3편 법과 문학 / 제2장 영미 문학 / 2. 모어, 3. 스위프트, 4. 디킨즈, 5. 드라이저 민주법연 2004.11.02 27868
15 제3편 법과 문학 / 제2장 영미 문학 / 1. 셰익스피어 민주법연 2004.10.25 29748
14 제3편 법과 문학 / 제1장 고대 문학 / 3. 성경 민주법연 2004.10.13 20894
13 제3편 법과 문학 / 제1장 고대 문학 / 1. 호머,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2. 플라톤 민주법연 2004.10.01 24708
12 제2편 법과 영화 / 제2장 행형 영화와 역사 재판 영화/ 2. 역사 재판 영화 15편 민주법연 2004.09.25 26402
11 제2편 법과 영화 / 제2장 행형 영화와 역사 재판 영화/1. 행형 영화 15편 민주법연 2004.09.21 21412
10 제2편 법과 영화 / 제1장 재판영화 / 2. 추리적 재판 영화 20편 민주법연 2004.09.18 23357
9 제2편 법과 영화 / 제1장 재판영화 / 1. 사회파 재판 영화 35편 (3) 민주법연 2004.09.10 27331
8 제2편 법과 영화 / 제1장 재판영화 / 1. 사회파 재판 영화 35편 (2) 민주법연 2004.07.29 23685
7 제2편 법과 영화 / 제1장 재판영화 / 1. 사회파 재판 영화 35편 (1) 민주법연 2004.07.06 22869
6 제1편 법과 예술 / 3. <법과 예술>의 어두운 관계 민주법연 2004.07.02 25097
5 제1편 법과 예술 / 2. 왜 <법과 예술>인가? 민주법연 2004.06.22 20450
» 제1편 법과 예술 / 1. 법, 법률가, 법학 그리고 예술 민주법연 2004.06.18 23944
3 머리말 민주법연 2004.06.11 19146
2 법과 예술 차례 민주법연 2004.06.11 2011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