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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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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사망에 부쳐
-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규탄한다 -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일을 내고야 말았다. 통치행위를 인정한 파병관련 결정이나 탄핵사건 등에서 보여준 과도한 월권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지만 너무나 빨리, 너무나 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은 수도 이전을 찬성하던 쪽도, 반대하던 쪽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결정이었다.

우리는 특별조치법 제정 과정이나 현 정부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는 행정수도 이전이 세간에서 논의되는 바와 같이 국민투표나 공청회 등 적절한 절차를 준수하여 이루어진 것인지에 관하여 새삼 논란을 벌일 생각은 없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국민주권주의 원리에 입각한 의회민주주의 제도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는,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이에 우리는 특별조치법에 대한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그러한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 자체에 대하여 국민주권과 의회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법학연구자로서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참으로 기괴하다. 크게 보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다음 3가지 명제에 입각하고 있다. 1) 기본적 헌법사항을 법률로 정하는 것은 헌법개정절차에 위반된다. 2) 수도의 소재지는 기본적 헌법사항이다. 3) 수도가 서울이어야 한다는 것은 관습헌법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명제는 모두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첫째, 기본적 헌법사항이라 하더라도 이를 헌법에서 명시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관습헌법에 해당하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민주권주의하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법률로도 정하지 못한다고 봐야 할지는 의문이다. 우리 헌법이 헌법개정절차를 법률개정절차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규정한 경성헌법체계를 취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헌법에서 명시하지 않은 사항까지 오로지 헌법개정절차에 의해서만 정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국회법 등 상당수의 법률이 실질적 헌법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는 지배적 견해에 비추어 보더라도 헌법에서 명문으로 규정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기본권의 제한을 가져오는 등 헌법이 규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닌 한, 대의기관인 국회가 법률로 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 헌법에 대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둘째, 수도의 소재지가 헌법사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정 국가의 헌법에서 수도의 소재지를 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기본적 헌법사항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생독립국이라거나 연방국가라는 특성 등 역사적 상황적 특수성 때문에 특별히 수도를 명문으로 규정할 필요성이 있는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특별히 헌법에 수도를 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수도의 소재지가 헌법 제정이나 개정시에 당연히 전제된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도 이전의 가능성을 헌법 차원에서 막아 놓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주변국과의 관계나 통일 후의 사정 등을 대비하여 수도의 소재지 변경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고, 역대 헌법이 수도 소재지를 명시하지 않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개방적 태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헌법재판소는 반대의견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수도가 서울이라는 사실로부터 수도가 서울이어야 한다는 당위를 끌어낸다. 그리고 수도가 조선시대 이래로 계속 서울이었다는 사실의 계속성과 항상성, 명료성으로부터 이러한 관행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실효성 및 강제력까지 끌어낸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계속, 항상 그리고 명료하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의 계속성과 항상성과 명료성과는 별개로 그러한 사실이 하나의 당위로, 즉 관습법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헌재의 표현대로, 그러한 사실이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승인이나 확신 또는 폭넓은 컨센서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서울이 앞으로도 계속 수도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러한 승인이나 확신 또는 컨센서스는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헌재의 설시처럼 이러한 컨센서스가 조선왕조의 창건 이래로 끊어짐 없이 존재해 왔다 하더라도 그러한 컨센서스는, 이미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대통령의 당선에 의하여, 아니면 늦어도 소수파 정부가 제안한 특별법안이 국회 다수당의 동조하에 압도적 다수로 본회의를 통과하였을 때, 이미 깨졌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헌재의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까지도 특별조치법폐지법률안이 제출된 적도 없지 않은가?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었고 지금도 서울이라는 것은 다툼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객관적 사실이 관습법이 될 수 있는가? 관습‘법’이라고 하는 것은 당위에 대한 것이지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즉 관습법이란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 여럿 존재할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어느 하나의 판단이 주도적인 지위를 가지고 오랜 기간 지속되어 그러한 판단 자체를 하나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정도가 되었을 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 그 사실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판단, 즉 관습법이라는 규범으로 바뀔 수는 없다. 그러한 사실이 유지되어 왔다고 해서 향후로 그것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수도가 서울이어야 한다는 관습헌법이란 국민의 법적 확신이나 국민적 합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헌법재판소의 창작물일 뿐이다. 그 창의성은 매우 뛰어나지만 이런 경우 법률가의 창의력은 참으로 위험한 독약이다. 그것도 헌법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포장된 독약이다.

그럼에도 한나라당은 이 결정에 대해 “법치주의의 승리”라고 했다. 그들이 어떤 ‘법치’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언급에서 우리는 ‘정치’의 실종을 읽는다. 한나라당이 17대 국회의원총선거 이전 행정수도특별법 제정에 동의한 것이 총선전략에 따른 잘못임을 인정하고 그 결과 헌재의 결정을 환영한 것이라면, 그들은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아니 이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오기 전에, 폐지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의 정치적 책무도 다하지 않은 채 입법부의 권능을 헌법재판소에 넘겨주는 길을 택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를 포기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결정에서 민주주의의 사망을 본다. 조선시대 이래로 서울이 수도였다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는 관습헌법을 이끌어내고, 급기야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성문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기괴한 비약까지 감행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헌법의 개정을, 헌법개정권력의 교체를 읽는다.

뿐만 아니라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는 것이 관습헌법이라는 이야기는 결국 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로 한다”는 헌법 규정을 창설한 것이나 다름없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통하여 헌법 조문의 내용 변경을 꾀하는 헌법개정권력임을 넘어서서 헌법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조항을 창설함으로써 스스로 헌법제정권력으로 우뚝 서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헌법재판소는 헌법이 부여한 최종적 헌법해석권에 더하여 헌법 제정권과 개정권을 모두 독점하게 되었다. 어느 교수의 말대로 이제 바야흐로 헌법재판소의 ‘사법 독재’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를 지난 3월의 실패한 의회쿠데타에 이어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사법쿠데타를 통하여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찬탈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더 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가 스스로의 독재를 선언하고 주권을 찬탈해간 이 결정에서 국민주권을 언급한 것에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지난 탄핵정국과 관련하여 이미 헌법재판소의 월권을 경계하는 입장을 밝혔을 뿐 아니라 법학교수의견서를 통하여 헌법재판소의 민주주의적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하여 헌법재판소가 단순히 그 민주주의적 한계를 일탈하는 수준을 넘어 민주주의 자체를 말살하려고 하고 있음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간 헌법재판소가 수행해 온 긍정적 기능을 우리도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의 사태는 헌재가 그간 수행해 온 모든 공헌을 무로 돌리고 스스로를 살헌(殺憲)기관으로 다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허무맹랑한 논리로 위헌결정, 아니 살헌결정에 동참한 재판관 전원의 사퇴를 요구한다. 아울러 헌법재판소가 민주공화국의 헌법원리에 충실하게 이바지하여 진정한 헌법수호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재판관을 민주적으로 재구성하고, 그 권한과 결정의 효력 역시 헌법이 허용하는 한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헌법재판소법을 전면 개정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헌법재판소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접고 차라리 헌재 폐지운동에 나설 것이다.

한편 한국의 헌법학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던 몇몇 원로 헌법학자들은 신문칼럼이나 인터뷰를 빌려, 헌법재판소가 탄핵심판사건에서 내린 잘못된 결정으로 실추된 명예를 이번 위헌결정으로 회복하였다거나, 용기 있는 결정에 대하여 경의를 표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더 나아가 이들이 헌법재판소에 관습헌법을 비롯한 기괴한 논리 개발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말까지 들린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충격을 넘어 서글픔을, 그리고 더 나아가 헌법재판소에 대해서보다도 몇 십 배, 몇 백 배나 더 큰 분노를 느낌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관계없이 최소한 법학자로서, 더욱이 헌법학자로서 해야 할 이야기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는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런데 헌법의 바른 해석과 헌법재판소에 대한 정확한 평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신장과 발전에 앞장서야 할 헌법학계의 원로들이, 결정의 내용과 의미조차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헌법재판소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두둔하고 나섬으로써 살헌행위에 동참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 많은 법학도들의 스승된 입장에서 법학자로서의 양심을 등지지 말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신장에 기여함으로써 법학계의 진정한 원로로서 자리를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2004년 10월 26일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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