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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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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권두언: 진보적 싱크탱크

김종서 2010.11.03 12:05 조회 수 : 10561

서경석, "권두언: 진보적 싱크 탱크", 민주법학 44호, 2010. 11, 7-13쪽.

 

【권두언】

 

진보적 싱크탱크

 

서경석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장, 인하대 교수

seogyung@inha.ac.kr

 

 

 

이명박 정권을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자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치적 통합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이 두 번의 자유주의 정권이 친재벌 정책과 시장중심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기반이었던 지지자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된 것과 함께, 대중들의 민주화투쟁으로 집권한 정권이 민주주의를 절차적 민주주의로 인식하여 굳건한 보수파의 전방위적 공세를 자초한 것은 이명박 정권을 출범시킨 토대이자 아직도 상당한 지지율을 유지하게 하는 원천이다.

이명박 정권에 있어서 신자유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닌 성격 때문이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든 그것이 절차적 민주주의 얼개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한 다양한 성격의 정치권력과 결합이 가능하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현재의 역학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틀이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아주 좁게 인식하는 경우 그에 기초하여 현재의 역학관계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아진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최소한의 형식적이고 제도적 민주주의로 여길 뿐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현실적 정치참여의 기회에 있어서 계급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승인하고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제한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하면, 지배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우월한 지위를 가진 세력의 정책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국가정책이 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주요 정책수립의 방편이 되는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투쟁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제한적인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은 이데올로기투쟁을 통해 진보진영이 대항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다. 진보정당, 노동조합, 진보적 시민사회단체가 그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진보적 정당조직들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고, 노동조합운동은 급속히 동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시민운동 또한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활동방식으로 인해 전방위적 정치적 개입을 추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자유주의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향후 전개될 이데올로기투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탓이다.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하여 보수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조직들이 시민사회에 지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 왔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명박 정권이 진보세력의 역량결집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능성이 엿보이는 공간은 역시 시민사회영역이다. 중장기적으로 진보진영의 싱크탱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소수의 명망가와 소수의 전문가만으로 이루어진 압력단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다수의 전문가와 광범위한 시민‧노동자가 소통하고 연대하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노동과 자본 등 전통적인 의제 외에 환경, 정보, 교육, 문화,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의 모든 문제를 의제로 다루는 진보적 싱크탱크는 진보정치와 진보적 대중운동을 결합시키고 소통하게 할 수 있다. 국책연구소, 자본 측의 보수적 연구소,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등의 시민단체와 본격적인 이데올로기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틀을 갖추기 위해 그간 일부 시민단체에서 부분적으로 의미 있는 실험을 수행하기도 했다.

 

 

 

2010년 7월말 백기완 선생이 사재와 통일문제연구소 재산을 모두 출연하여 ‘노나메기재단’의 설립을 제안했다. 진보정치와 진보적 대중운동과 융합하는 학술, 문화, 교육, 생활운동을 표방하는 노나메기재단은 ‘진보진영의 통합 전략 싱크탱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통섭형 대중문화 교육모델 및 통섭형 민중생협 모델의 개발과 전국적 네트워킹 구축’을 목표로 삼는다. ‘거시적 전략정책연구사업’과 ‘노나메기 다중문화교육생활협동조합운동’이 사업의 주력임을 밝히고 있다.

진보적 싱크탱크를 위해서는 다양한 의제에 관한 전문가를 조직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양한 분야의 진보적 법연구자들이 결집되어 있는 민주주의법학연구회가 진보적 싱크탱크로 변신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법과 제도가 구체적인 정책의 결과로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관련분야의 법과 제도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법연구자들이 정세분석을 기반으로 하여 실천적인 의미의 정책대안을 생산하는 것은 민주법연 회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과제는 아니다. 이는 민주법학에 수록되는 논문들을 살펴보아도 금세 알 수 있는 일이다. 진보적 법학이론의 계발이나 진보적 법학이론의 대중화 작업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글보다는 현실적인 정책과 관련되었거나 정책으로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논문이 압도적이다. 게다가 민주법연은 다른 일반적인 학회와는 달리 다양한 전공의 법연구자들이 모여 있는 까닭에 거의 모든 시민사회단체와 교류가 가능하여 비록 생소한 주제라 할지라도 사회적 의제별로 전문화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 또한 분명하다. 모든 사회적 의제에 있어서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외부에는 해당 의제를 다루는 전문가조직이 존재한다. 비록 법과 제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고유의 논리구조를 연구대상으로 삼지는 않아도 노동이든 환경이든 아니면 교육이든 관련분야의 법과 제도에 대해 전문지식을 지니고 있는 전문가들은 민주법연의 관련법연구자들보다 전문지식이 훨씬 앞선다. 이 경우 법연구자들은 법제도 내재적인 논리구조를 분석하는 보조적인 역할분담에 자족하게 될 수도 있다. 스스로의 싱크탱크 역할이 제한적으로만 수행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법연구자들이 현실적인 정책(대안)제시에 전념한다면 그나마 축소되고 있는 진보적 법학이론의 계발은 더욱 위축될 수도 있다. 이 경우 별도의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이론적 작업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진보적 법연구자는 단기적 전망에만 급급한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연구방식에 갇히게 될 수 있다.

 

 

 

최근 수년간 민주주의법학연구회는 정책(대안)마련을 주요한 사업으로 설정하는 변신을 모색해 왔다. 여기에는 주객관적 상황변화가 조건이 되었다. 1989년 창립 이래 변혁적 민중운동이 점차 쇠퇴하고, 입법투쟁과 사법투쟁 등을 주된 수단으로 법제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개량적 시민운동이 민중운동을 대체해 왔다는 점,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여 급진적 담론이 급격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는 점 등이 객관적 조건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다 자기만족적 정량평가적 연구방식을 거부하지 못한 법연구자들의 무저항적 순응주의가 보태졌다. 쁘띠부르주아적 생활양식에 편안함을 느끼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여러 갈래로 논의가 흩어지고 다시 모아지는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진보적 싱크탱크를 목표로 하자는 주장이 유력하게 제기되었다. 이는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원들을 시험하는 것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얼마나 큰 틀에서 사고해 왔느냐를 묻는다는 것, 둘째는 그간 불편했었을 이념적 지향성에 얼마나 충실했었는지를 묻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금 예전의 열정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묻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힘들게 하는 것은 마지막 질문이다. 십일조의 헌신으로 열정을 재겠노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예전의 열정을 재차 불 지피기 위해서는 싱크탱크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싱크탱크의 이념적 방향에 온전히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얼핏 확신과 동의의 정도는 과거의 것보다 훨씬 더 커야 할 듯 보인다. 지식인의 특권인 기회주의적 생활의 편안함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적 싱크탱크는 변혁적 열정까지 요구하지는 않는다. ‘아이디어 브로커’에게 알튀세르 식의 ‘이론적 실천’의 짐조차도 버거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소진해가는 연구회의 역량을 새로운 기획을 통해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2010년의 마지막 민주법학이 출간되는 순간까지도 확정되지 못했다. 애초의 의도대로라면 이번 호에는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새로운 변신을 알리는 선언문이 실렸어야 했다.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낀다.

이번 호에는 특집 없이 8편의 글이 실렸다. 애초 특집으로 교육에 관한 논문을 의뢰했으나 몇 편이 심사과정에서 탈락하고 오동석의 논문(“교사의 정치적 기본권”)만이 전선에 실리게 되었다. 이 글은 교사의 공민권 회복이 교육의 토대임을 규명하고 있다. 특집은 사전에 기획하여 편성하기로 했기 때문에 편수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숨기지 않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판단했다.

김재완의 글(“반도체산업 노동자의 암 발병과 직업병 인정을 위한 법적 방안”)은 직업병 인정을 위해 요구되는 역학적 인과관계의 요건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인과관계의 올바른 규명을 위한 법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불안정노동의 철폐를 위해 애쓰고 있는 윤애림은 “다면적 근로관계에서 사용자 책임의 확대: 노조법의 ‘사용자’를 중심으로”에서 노조법상의 사용자 책임을 져야 하는 사용자 범위를 판단할 기준을 합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에 일가를 이루고 있는 이경주는 올해 6월 민주법연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보완하여 “평화체제의 쟁점과 분쟁의 평화적 관리”의 제목으로 종래의 평화체제 구축안들이 천안함 사건 이후 어떤 문제점을 드러냈는지 밝히고 분쟁의 평화적 관리 구상을 보다 구체화할 것을 주장한다. 깊으면서도 선도적인 연구를 지속해 온 이재승은 이번에는 “확산탄금지협약의 발효와 한국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확산탄 문제를 다루고 있다. 확산탄금지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될 법적 책임 문제를 분석한다. 황인영의 글(“미국의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에 관한 쟁점과 그 국제적 함의”)은 저작권 보호기간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하는 미국의 소니보노법의 정립과정과 이 법의 위헌 여부를 다룬 엘드레드 사건을 심층 분석하고 있다. 저작권법에 관한 논의에서 주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호에는 판례분석으로 조경배의 글 “형법상 업무방해죄와 쟁의권”과 박지현의 글 “언론사 광고주에 대한 불매운동의 고지행위의 형사책임”이 실렸다. 전자는 헌법재판소의 2009헌바168 결정을 대상으로 하여, 헌법재판소가 쟁의행위를 원칙적으로 위법한 것으로 보고 정당성 요건을 갖춘 경우에 한해 위법성을 조각한다는 법원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헌재의 결정이 지닌 한계를 조목조목 재차 비판하고 있다. 후자는 서울중앙지법 2009노3623 판결을 대상으로, 언론사의 왜곡보도를 시정하기 위해 광고주를 대상으로 불매운동을 고지한 것 등이 강요죄와 공갈죄에 해당한다고 한 판결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도 김종서 편집위원장과 오길영, 박지현 두 편집실무위원의 노력으로 300쪽이 넘는 분량의 민주법학이 빛을 보게 되었다. 김종서 편집위원장께는 다음 호부터는 고맙다는 말을 내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언가 짐을 벗은 느낌이다. 미안한 마음으로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큰 고역이다. 다른 두 분을 포함하여 그저 감사할 뿐이다. 민주법학의 발간을 후원해 주신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분들과 관악사 신재일 사장과 직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 회원이 아닌 많은 독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내부의 변신 논의를 장광설로 늘어놓은 데 한마디 변명이 없을 수 없다. 이러한 논의가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라면 이 논의가 훗날 나오게 될 민주법연의 백서 형식으로 박제화되지 않고 역사의 순간에 독자의 머리와 심장에 맡기는 것이 옳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켜봐 달라는 자신감의 표출로 이해되어도 좋고 조언해 달라는 간청으로 보아도 좋고 동참해 달라는 연대감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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