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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4
이계수
조회 수 : 11833
2000.11.27 (00:00:00)
베를린리포트

이계수(울산대, 교수)


K에게

학기가 끝나자마자 울산을 떠나 이곳 베를린에 와 있다.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답게 여전히 웅장하다. 독일정부는 1990년 독일 통일이후 독일의 새로운 수도로 베를린을 선택하였고 1999년 11월 연방정부 기구들 중 대부분이 베를린으로 이주함으로써 10년에 걸친 베를린 이주작업은 이제 끝나가고 있다. 그래도 도시의 곳곳에는 옛 동독 시절의 흔적을 지우려는 공사들로 분주하다. 앞으로 또 10년 후면 이곳 베를린은 명실상부하게 중부 유럽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겠지만 말이지. 베를린에 대한 외부적인 정황은 대략 이렇다.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건물은 웅장하고 외관은 화려하지. 오스트리아의 빈이나 프랑스 파리를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눈치챌 수 있듯이 이들 도시들은 과거 마치 '체제경쟁'을 하듯 보다 크고 화려한 건물들을 짓는데 열중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베를린은 비교적 늦게 이 체제경쟁에 뛰어들었다고 할까? 1870년대가 되어서야 이 도시는 지금과 같은 규모로 성장하기 시작했지.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이 영국, 프랑스에 비에 늦었듯이 말이야. 그래서 베를린 사람들은 이 시기를 '건설기'라고 부르더군. 어찌되었건 나는 도시의 이런 외관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부감 마저 드니 말이야. 건물도 하나의 문화라면 화려하고 웅장한 기둥들은 '지배의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지. 법원 건물을 봐! 독일의 법원건물은 어느 건물보다도 웅장하다. 청사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 등 커다란 상징물이 서있다. 중세 게르만 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라 하여 법원 앞에 보리수나무를 심어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상징물들 앞에서 사람들은 곧바로 법에 대한 강요된 외경심을 갖게 되겠지. 국가의 권위는 이미 건물의 겉모습에서 철철 흘러나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겉모습의 권위가 빚어내는 희극목록의 한 끝에 '쾨페닉의 대위, Hauptmann von Koepenick'가 올라와 있다.

서두가 길었군. 어쨌건 내가 이곳에서 보고 싶은 것은 건물이나 외양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다. 어느 나라나 그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게 마련일 테고. 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이 사람들의 속마음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외지인에게 허락된 내밀한 공간은 그러나 많지 않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발로 여기저기를 가보았다. 그러다가 과거의 동베를린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시재개발이 우리의 도시재개발처럼 가난한 자들을 도시외곽으로 몰아내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130만 명이 모인다는 테크노 축제의 뒷골목도 그냥 내 눈으로 가감 없이 보았다. 그리고 그들도(독일 법과대학생, 법률가들) 우리처럼 그저 출세와 안락한 삶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 참된 저항정신을 만나기란 쉽지 않더라.

사물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명확한 상을 볼 수 있다지. 그래서 우리에게도 늘 조금의 거리가 필요한 모양이다. '디스탄즈의 미학'. 지난 번 독일에 왔을 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떨어져 있을 때 모든 게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옛날 사람 이름에 개똥이 말자, 이런 이름들. 오래 살라고 지워준 이름이라고 들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이들이 실제로 오래 살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튀면 죽는다는 쓰라린 경험이 그런 이름 짓기에 녹아 있는 듯하다. 남이 장군 같은 이는 너무 튀어서 일찍 죽은 것일까. 지금의 n-제너레이션은 튀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 피곤해서 이제 자판에서 손을 떼야 할까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이렇게 말하며 너에게 쓰는 '숙제편지'를 접는다. "주체적으로 변화시키자, 우리 세상을!" 결론을 위한 결론이라고 너무 타박하지 말게나. 울산에서건 어디에서건 술 한잔 해야지. 안녕. 아우프 비더젠.

2000년 8월 베를린에서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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