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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10542
2006.11.13 (18:58:24)
학교를 옮기면서, 그동안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추적하는 것을 계속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사이에 몇몇 글들을 쓰기는 하였는데, 일단 그것들을 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난 10월 말에 써서 열린전북 1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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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과 한반도 비핵화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이스라엘처럼 핵실험이 없이 핵보유를 기도할 수도 있으며, 핵실험의 카드를 좀 더 활용해 볼만도 한 데, 한 번 예고한 후 곧장 실행에 돌입하였다. 추호의 주저함도 없는 결행의 서슬이 퍼렇다. 이번 핵실험에는 대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대내적인 차원에서도 어떤 절실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북한의 핵실험 성공 발표문에서, “강위력한 자위적 국방력을 갈망해온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커다란 고무와 기쁨을 안겨준 역사적 사변”이라는 문구가 뇌리에 남는다.

  나는 북한이 이처럼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작년 봄에 미국에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우려와 보도가 잇따르던 때에 나는 북한 리찬복 상장의 발언에 기대어 핵실험 대한 걱정은 기우일 것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망상증을 탓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에게 평화 이니셔티브를 주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북한은 마침내 핵실험을 감행하였으니, 어찌됐든 나의 예상은 빗나갔고, 기대는 무산되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그것 봐라, 그 동안 북한의 핵개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졌지 않느냐면서, 나와 같은 대북 온건론자들을 비난한다. 아니 그 유치함을 비웃는다. 그리고 그러한 순진하고 어리석은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이 바로 북한의 핵능력을 키웠다는 책임론을 제기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그 동안 대북 정책을 둘러싼 논란에서 강경보수의 한 판 승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근태 열린 우리당 의장이 개성공단에서 춤을 추었다고 구설수에 올랐는데, 실제로 북한 핵실험으로 내심 쾌재를 부르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북한의 핵실험은 불행한 일이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부쩍 높아졌다. 나아가 일본에서도 핵무장론이 나오고 있고, 우리도 작년 한․미 안보협의회(SCM)에서는 핵우산 부분을 뺄 것을 제안했으나, 이번에는 정 반대로 더욱 강화하자고 요구하였다. 북한 자신도 핵개발의 성공으로 그 자부심은 높아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궁하고 핵실험에 따른 경제 제재로 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더욱이 이번 실험은 2차, 3차 실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인데, 북한의 영토적 제한성을 생각하면 그 방사능 오염의 문제 또한 마음에 걸린다. 북측도 그 문제를 고민했음은 분명하고, 이번 핵실험의 예고에서도 소위 ‘과학적 안전성’이 담보된 실험임을 공언하였지만, 나로서는 어떤 과학적 방책으로 지하수의 오염가능성까지 차단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도리어, 북한의 선군정치의 논리가 과학의 논리까지 압도한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나의 희망어린 예측이 틀린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북한의 체제가 경색되어 가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북한의 행보를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한반도에 위험이 가중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북한의 선군정치가 하나의 논리로만 되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선군정치에 군사주의적인 색채가 짙게 배여 있음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1990년대 후반 북한의 정상적인 국가운영체제가 마비된 상황에 주목하고 싶다. 당시 북한이 총체적으로 붕괴하면서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고 복구하며, 공동체의 규율과 정신을 추스를 수 있는 집단은 군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수도꼭지 하나가 고장 나도, 더 이상 관(官)이나 민(民)에서 해결할 수 없고 군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군은 치안과 행정을 떠맡음은 물론이고, 댐 건설, 도로 건설, 토지정리, 축산기지, 양어장 등 산업 기반시설 복구와 건설도 담당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인민군대 따라 배우기’ 운동이 전사회적인 구호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어떤 성취의 개가(凱歌)가 아니라 인고의 희생을 뜻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군은 그 어려운 시기 무너져 내리는 북한 사회를 온 몸으로 버텨 막아낸 것이다. 1950-60년대 북한의 경이로운 전후(戰後) 성장에 노동계급의 천리마 운동이 있었다면, 1990년대 참혹한 시기 고난의 행군의 주역은 군인들이었던 것이다. 선군후로(先軍後勞)의 기본개념은 그렇게 파악된다.

  물론 북한의 선군정치가 미국과의 대립 상황에서 무엇보다 군사적 존엄으로 이해됨을 부인할 수 없다. 핵무기 개발은 그 논리적 귀결이며, 그로부터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감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니, 결국 남한도 선군의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과대망상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선군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체제 파탄의 상황에서 나온 북한 사회의 존립방식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울러 그것은 사회가 몰락하면서 군이 무정부적 혼란과 내전의 진원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군의 통일성과 ‘혁명적’ 군인의 기풍을 고수하려는  김정일의 군 통제 전략일 수도 있다.

  이처럼 선군정치의 대내적 차원에 군사만이 아니라 평화와 안녕의 측면도 있다면, 그 대외적 차원에서도 외교와 협상의 논리를 배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북한이 핵무기의 획득이라는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해 왔다는 주장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윤색된 단순논리라고 본다. 흔히들 북한 강경파의 대표도 김정일이고, 협상파의 대표도 또한 김정일이라고 얘기한다. 북한은 늘 ‘대결에는 대결에로, 대화에는 대화에로’라며 어느 쪽이든지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핵실험 후에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다짐은 빼놓지 않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단지 기만의 수사학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일관되고 분명하다.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은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김정일의 발언이다. 북한 체제에서 김일성의 권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는 말의 무게를 우리는 소홀히 할 수 없다. 북한이라는 체제가 어떤 나라인가? 김일성은 북한의 건국 시조이며 북한의 헌법은 ‘김일성 헌법’이고, 북한의 주석은 영원히 김일성이다. 김일성의 유훈으로 공식화되면, 이는 군부와 노동당은 물론이고, 심지어 김정일 자신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인 것이다. 김정일은 이 말을 작년 정동영 장관이 특사로 갔을 때도 하였고, 이번에 중국의 탕자쉬안 특사에게도 하였으며, 6자회담이 열릴 때마다 북한은 자신들의 최종목표는 한반도 비핵화임을 누누이 천명하였다.

  물론 김일성은 오래전부터 핵개발에 착수하여 왔다는 반론이 당장 나올 수 있다. 그렇다. 주지하듯이 북한의 핵개발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길게 잡으면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에 미국의 핵무기가 수 백 기 씩 있으며, 중․소와도 거리를 두는 독자노선을 걷는 북한으로서 핵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박정희 정권이 ‘닉슨 독트린’ 이후 안보 불안감이 증대됨에 따라, 핵개발을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한 것도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정말 김일성의 처음 뜻은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핵에는 군사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침내 1980년대 후반 북한의 핵개발은 미국의 관심을 끔으로써, 북한은 핵의 군사적 효능에 앞서서 중요한 외교적 성과를 얻게 된다. 그 하나는 미국의 ‘상대’가 되는 데에 성공하여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북미 고위급 회담을 열게 된 것이고, 그 둘은 미국의 핵사찰의 요구를 남한의 핵무기 철수와 연계시킴으로써 한반도 비핵화의 의제 설정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위한 우리 남한의 노력도 가상하였으니, 노태우 정부는 1988년에 이미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규정한 7․7선언을 발표하였음은 물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북방정책을 꾸준히 전개하였던 것이다. 시운도 도와주어 세계적 냉전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미국은 남한에 있던 핵무기들을 모두 철수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반도는 중요한 평화의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1991년 말에 남과 북은 역사적인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고, 이어서 한반도 비핵화에도 합의하였다. 또한 한․미는 핵공격이 포함된 팀 스피리트 훈련을 1992년부터 중지하기로 하고, 북한은 핵 재처리를 중단하며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기로 합의하였다.

  북측의 이러한 합의는 김일성의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김일성 주재로 1991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러한 합의들을 공식적으로 추인하며, 한반도 통일의 역사에서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치하하였다고 한다. 셀리그 해리슨은 이날의 노동당 회의를 실용주의 노선의 조건부 승리라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조국 통일을 지상과업으로 설정한 북한의 ‘건국 시조’인 김일성이 1950년에 전쟁을 통하여 공산통일을 성취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후, 반세기가 지나 변화된 상황에서 평화공존의 형식이라도 통일을 이루어 위대한 지도자로 남겠다는 소망을 품었으리라는 추측은 그렇게 가당찮은 것은 아니리라.

  물론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행로는 이후 곧바로 비틀거리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이미 추출해 놓은 플로토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를 거부하였고, 미국과 한국의 강경파는 북한과의 평화공존의 가능성에 대하여 불신하였다. 마침내 한․미는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를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북한은 NPT 탈퇴의 선언으로 대응하면서, 1994년 한반도는 전쟁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카터의 용기 있는 방북과 김일성의 화답으로써 전기가 마련되고 마침내 북미 제네바합의가 타결된 것이다. 이후 적어도 미국에 부시정부가 출현하기 전까지 한반도의 평화의 흐름이 꾸준히 진전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미국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 북한 핵실험은 플로토늄에 의한 핵이었다고 한다. 플로토늄은  1991년의 비핵화의 합의 이전에 추출한 것(핵무기 한두 개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양으로 추단됨) 그리고 이후 현재의 부시 정부가 들어선 후에 추출한 것이 전부이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의 지적대로, 북한은 클린턴 정부시절에는 단 1g의 플로토늄도 추출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이 단선적으로 핵개발을 도모하여 왔다면, 클린턴 정부 시절 북한의 자제, 특히 1993년 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곧바로 핵재처리에 들어가지 않은 점, 그리고 NPT 탈퇴의 효력발생 시한이 다하기 직전 먼저 미 국무부에 연락하여 협상을 모색한 점 등을 설명하기 어렵다.

  한반도에 핵무기가 다시 생기고, 그것도 북한이라는 비민주적 정권의 손에 쥐어진 것은 비극이다. 그런 점에서 나 같은 햇볕론자들은 일단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이 곧 파국은 아니다. 상황은 아직 진행 중이다. 핵 개발은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다. 남아공 등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가 해체한 사례도 있다. 마찬가지로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더욱이 그 정책들은 김대중 정부에서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노태우 정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또 그것은 한반도 평화 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결코 끝날 수 없는 정책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우리 정부의 것만이 아니고 미국은 물론 북한까지도 평화와 공존의 의지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속하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는 비민주적이나, 북한의 지도부를 비이성적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 이는 고이즈미조차도 긍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북한의 이성이라는 것은 ‘위신’, 즉 몽테스키외가 군주제의 정신으로 얘기한 바와 같은 ‘명예’의 논리라는 점이 우리 자유민주주의와 다를 뿐이다.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이 김일성 사망 시에 최초로 애도 성명을 발표한 덕에 협상의 진전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초강대국인 미국이 북한의 체면을 좀 세워주는 것이 과연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하여 우리 군이 크루즈 미사일 개발을 공표하고, 독자적인 핵개발론까지 제기하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시 평화를 위한 조건으로 만드는 데에 최선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 전화위복의 요청은 어떤 신기(神技)가 아니라 대북 포용정책, 즉 한반도 평화정책의 근본에서 나오는 육성(肉聲)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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