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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23 (00:00:00)
남녀평등에 대한 단상

조국(서울대)                    


    1998년 내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아내의 경우 박사과정은 수료하였으나 논문을 집필하지 못한 채로 같이 귀국하였다. 이후 아내는 국내에서 '겸임교수'로 학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논문제출을 위하여 매번 여름, 겨울의 두 번의 방학에는 해외에서 체류하고 있다.

   여하튼 아내의 공부를 강권한 덕에 수 년째 방학 동안에는 가사와 육아 등 집안 일을 혼자서 떠맡아야 한다. 고교졸업 때까지 부엌출입을 엄금하는 분위기에서 살아 온 '경상도 남성'으로 여러 가지 소회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집안 일을 할 때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가 이 시간을 더 가치 있는(?) 일에 쓸 수 있지 않을까"였다. 또한 나의 아내가 '전업주부'이었다면 내가 연구와 사회활동을 더 많이, 또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몽상도 사라지지 않는다. 집안 일을 아내에게 전담시키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으니, 나는 여전히 "무늬만 페미니스트"인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숭고한 목표도 그것을 실현하는 세세한 과정에서 힘이 들면 말과 몸이 따로 가게 되는 법. 이론적으로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을 논하는데는 능숙하였으나, 생활에서 이를 실천하는 일은 어려우니 나는 "얼치기 책상물림"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오늘 저녁도 나는 빨간 고무장갑을 낀다. 여성문제를 나의 전공인 형법쪽으로 끌어 들여 생각해보면 일단 한국 형사절차에서 강간피해자가 당하는 "제2차 피해자화" 과정이 당장 떠오른다. 수사과정에서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진술을 받을 때 범죄증명과 무관한 피해자의 성경험, 평소의 평판, 사건 당시의 옷차림과 행동, 반항 정도 등을 질문하며 이에 따라 피해자는 또 한차례의 모욕과 비인간화의 경험을 겪게 된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피해자에 대한 반대신문에서 피고인의 변호인은 강간이 존재하였는가와 관련성이 없는 질문, 예컨대 피고인이 사정을 하였는지, 삽입시간은 얼마나 길었는지, 삽입 동안 피해자의 느낌은 어떠하였는지 등을 세세하게 질문하고, 나아가 피해자가 충분히 반항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강간충동을 부채질한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반대신문이 진행될 때 검사는 논점을 벗어난 것이라는 이의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고 있고, 판사 역시 이러한 방식의 반대신문을 제지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성규범을 따르지 않는 여성으로 낙인찍히는 피해자는 재판과정에서 보호받기 보다는 불신받는 경향이 있고 이를 또한 형사사법실무자들이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나의 일자리인 법과대학 상황을 보면, 현재 한국 법학계에서 여성 법학교수의 수는 매우 적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공식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남성 교수 사이에 은밀한 묵계로 여성 지원자를 배제하는 경향이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하리라. 그 남성 교수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관계없이 말이다. 남성 지원자와 여성 지원자가 거의 동급의 수준일 때 선택의 손길이 남성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지는 않는가? 남자가 직장을 먼저 가져야 한다, 여성교수는 가정일 때문에 학과운영에 충실하지 못하다 등등의 남성중심적 이유가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지는 않는가?

  최근 들어 본교 출신이 아니면서 동시에 여성박사 두 명을 동시에 채용한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의 모범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이러한 경향은 큰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규모가 큰 전국의 법과대학에 여성교수가 몇 명이나 있는지 세어보면 이는 금방 확인된다. 여성교수의 부재는 일차적으로는 학자를 지향하는 법대 여학생의 꿈을 초반에 봉쇄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법규범, 법제도 및 법해석에 깔려 있는 남성중심적 관념이 교정될 기회를 봉쇄하는 기능을 하기 쉽다. 물론 모든 여성교수가 페미니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오히려 남성중심적 관념을 체화하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 법학교수의 수를 늘린다는 것 자체가 현 시기 우리 사회의 진보에 무조건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은 제도적, 거시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미시적 차원에서, 생활 속에서, 그리고 어떤 '큰 목표' 이후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 자기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고민되고 실천되어야 할 사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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