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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5.22 (00:00:00)
아직도 국기에 대한 맹세인가

송기춘(경남대 법행정학부)


    몇 해 전 고등학교 졸업 기념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사적인 행사이지만 학교에서 열리는 행사라 그런지 모임은 국민의례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국기에 대한 경례와 함께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는 귀에 익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군 제대후 국민의례가 약식으로 행해진 모임에만 참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직도 여전히 국기에 대한 경례와 함께 국영방송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녹음된 엄숙한 '맹세'를 듣고 또 '해야' 하는 마음은 실로 착잡한 것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시기에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과 함께 새로운 국가의 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일제시기의 일장기에 대한 경례, 일본국가 제창, 신사참배강요 등을 겪은 후라 국가권력에 의한 양심과 종교의 자유 침해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도 우렁찼으며, 특히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국기경례거부 움직임이 일기도 하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 역시 국가에 대한 경례가 아니라 국기에 대한 주목에 찬동하기도 하였지만 1950. 5. 16. 국무총리의 국기에 대한 경례통첩과 문교부의 국기에 대한 예절에 관한 지시를 통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자리잡게 되었다. 1973년에는 학생교련교육이 실시되었고 1976년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학생에 대한 제적조치에 관해 대법원이 정당하다고 판결하였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내용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시에 낭송하는 '맹세문'이다(대한민국국기에 관한 규정 제3조). 이 맹세문은 박정희의 독재가 극에 달하던 1970년대에 시작되었던 것이며,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도록 하던 조치와 함께 박정희 정권의 '국가관' 확립교육의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건강한 국가관을 가지고 또 그렇게 교육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국기에 대한 맹세는 문제가 많다. 첫째,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좋게 보면 중요한 덕목일 수 있다. 忠이 단지 국가나 군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중심을 확고히 하고 또 그렇게 정한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고, 誠이란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충과 성이야 금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장려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충성이 이와 같은 개인의 양심과 마음의 중심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다짐을 요구할 일도 아니며 개인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태극기 앞에서 이러한 다짐(충성선서)의식을 치른다면 이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문제만 아니라 태극기에 일정한 종교성을 가미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둘째, 하지만 이 맹세문에서의 충성은 국가 상징의 하나인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하는 것이고 보면 그 충성은 단지 자신의 양심이나 마음의 중심에 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공동체는 그 소속구성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은 중요하고 일정하게 공동체적 구속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의 존립이유와 그 성격을 묻지 않고 공동체적 구속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직이며 그러한 성격을 가지는 한에서만 그 권력행사가 정당화된다고 한다면 국가의 존립이유와 성격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이 오로지 충성만을 맹세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 할 것이다.

   셋째,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흔히 사용되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은 실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따르는 종교 또는 궁극적 관심과 관련할 때에만 가능한 말이다.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배할 것을 종교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맹세문은 단순한 문장을 넘어서서 국가에 대한 궁극적 고백을 담고 있으며 헌신을 다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맹세문'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한다면 이 다짐은 개인이 가지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과 결코 조화롭게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섯째, 만약 이러한 맹세가 단지 시키니까 하고 학생이나 군인 등과 같은 경우 제재를 제외하고 국민일반에 대한 제재가 없으며 또 억지로 그런 고백을 하길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문제이다. 어찌 엄숙한 고백을 입에 발린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엄숙한 고백과 다짐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무미건조한 말이 되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존 밀튼은 아레오파지티카에서 검열제도는 거짓말을 강요함으로써 그 사회의 존립과 발전의 기초가 되는 진실이라는 덕목을 해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건강한 국가관과 진실을 교육해야 할 국가는 이러한 맹세문낭송을 통해 이제는 거짓말을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도록 강요했던 것 역시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개인을 삶으로부터 소외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리낌 없이 하게 되면서 우리는 국가가 어떠한 모습을 하든 그 존속과 번영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거나 겉의 행동과 속 마음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국가에 대한 건전한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존재이며, 그러한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은 또한 국민의 의무임을 가르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를 신비화하거나 무비판적이게 하거나 심지어 우상화하는 것은 결코 우리 헌법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반대의 입장이나 최근 헌법재판소의 준법서약서합헌결정에서 제시된 의견 역시 오랜 기간 동안 국가교육을 '잘' 받은 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길이 없다. 국가의 기본권침해에 대한 감시가 종전보다는 잘 이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작 과거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문제가 이제는 하찮은 것처럼 다뤄지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올바른 국가교육을 위해서도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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