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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5 (00:00:00)
지하철 전광판 올려다보며 상념에 빠지다

                                                     김도현(서경대)


나는 오늘도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이 없었던 또는 부족했던 지난 시절을 회상해보면 아련한 낭만의 추억도 없는 것은 아니나 아침저녁으로 치러야 했던 등하교 전쟁의 기억은 거의 몸서리처지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특히 출발시에 핸들을 급히 틀어 짐짝들을 버스안으로 몰아넣는 동시에 재빨리 출입문을 닫는 운전기사 아저씨들의 실력은 예술의 경지에 가까왔지만 승객들에게는 실증적인 폭력에 다름아니었다) 그래서 비록 서슬퍼렇던 군부독재에 의하여 시작된 사업이기는 하지만 도심 지하철시대를 기쁜 마음으로 반기는 것은 나만의 편견은 아닐 것이다.

나는 시계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안그래도 "바쁘다 바뻐"를 연발하며 살아야만 하는 가혹한 시간논리의 옥죄임 속에서 시계에까지 목매달면서 고달픈 일상을 더욱 고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다.(가지고 다니고 싶어도 수은전지 안 갈아끼운 지 너무도 오래돼서 장식기능 외에는 그 어떤 실용적 기능도 상실한 것을 무에다 쓸려고 무겁게 갖고 다닐 것인가) 그래도 약속시간이 촉박해서 지하철을 탈 때면 수시로 전광판 시계를 힐끔거리며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대인의
운명인가 보다. 약속은 약속인지라 지켜야 하지 않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요즘 지하철 전광판이 시민들에게 가하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의 한자락을 접하지 않을 수 없어 씁쓰레하곤 한다.

내가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전자식 전광판으로 개비하였다. 그런데 전자식 전광판을 보고 현재 시각을 알려고 하다가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이고 목 빠지기 일보직전까지 가는 것이 보통이다. 다행히도 어쩌다 한번씩 타게되는 지하철 2호선은 여전히 고색도 창연한 구식 전광판인지라 이것과 비교해보면 그 이유를 당장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구식전광판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현재시간과 열차가 곧 도착할 지 여부, 그리고 다음 열차의 행선지를 일목요연하게 즉각적으로 알 수 있게 해 준다. 언제나 보고 싶을 때 간단히 쳐다보는 것으로 필요한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전자식 전광판은 어떤가. 현재시각 한 번 알려고 하다가는 눈이 아프고 목이 빠진다. 모두 광고 탓이다.

"삼성 래미안... " 등으로 이어지는 광고를 한참동안 보지 않으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전자식 전광판의 현실이다. 우리는 왜 현재시각과 같은 간단한 정보 하나을 얻기 위해 수분동안 대기업들의 광고를 들여다보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것이 보기 싫어 잠시 외면하면 현재시각 표시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탓에 또다시 대기업 광고를 한참이나 참고 응시해야만 다음에 나타나는 현재시각을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전광판 광고만이 아니다. 차라리 열차내 좌석 위의 광고는 양반이다. 보기 싫으면 안보면 그만이다.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기거나(솔직히 말해서 졸거나) 책이나 잡지를 뒤적이면 광고의 폭력에서 해방될 수 있다.(게다가 좌석 위 광고는 경기의 부침을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경제지표 노릇도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요즘은 지하철 출입문이나 출입문 바깥 외벽에도 커다란 광고가 붙어있어 타고내릴 때마다 어김없이 나의 인식을 후벼판다. 어디 그뿐이랴. 아름다운 분수를 만들어 시민들의 눈을 편안히 해 주겠다면 시작한 공사가 종국에는 꼴사나운 물줄기 몇 가닥 졸졸거리는 위에 커다란 광고판이 들어서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특히, 가끔 경험하게 되는 일인데, 지하철 객차 내를 완전히 한 회사의 같은 광고를 도배를 하는 경우에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다. 눈만 뜨면 이놈의 획일적인 광고들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기 때문에...

지하철공사가 돈이 없기는 없나 보구나... 불쌍타 생각하다가도 과연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설사 아무리 돈이 없기로서니 시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이용하는 공공지하철을 이렇게 광고로 도배를 해야만 하나?...하는 생각도 든다. 군사독재로 시작한 지하철사업이 자본독재로 끝나야만 하는가... 어이하여 공공영역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는가... 이런 하릴없는 단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가 스러진다.

어찌 지하철뿐이겠는가. 가장 공공성이 충만해야 할 교육영역이, 특히 대학마저도 신자유주의의 유령에 휘말려 경쟁력 최우선주의의 기치하에 취업알선기관이 되어 버린 작금의 시대에 지하철 정도야 뭐 우습지 않은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죽어가는 대학에서, 점수따기 어학과 얕디얕은 컴퓨터 기술과 알맹이 없는 자격증 획득이 주된 교육이념이 된 대학에서 녹을 먹고 있는 필자가 지하철에 서운함을 표할 염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실증적 폭력과 이데올로기적 폭력을 넘어서는 공공성의 마지막 짜투리나마 보고 싶어하고 부여잡아 지켜내고 싶어하는 것이 필자만의 과잉된 욕구일까? 오늘도 지하철을 타는 나는 눈을 내리감고 오지않는 졸음을 청하면서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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