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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94
조회 수 : 9637
2006.08.18 (14:46:34)


이상수(한남대 법대 교수)

지난 8월 16일 대법원장은 “전국의 모든 법관들과 더불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깍듯이 고개 숙여 용서를 빌었다. 일국의 사법부 수장으로서 모든 자존심을 꺾고 국민을 향해 개과천선을 약속하는 것이야 탓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기실 그 내용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제대로 된 사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대법원장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않고 기껏 전국법원장회의의 훈시에 슬쩍 끼워 넣는 식으로 용서를 빌고 있다. 국민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부분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내용적인 것이다. 대법원장은 무엇을 사죄해야 하는지조차 제대로 집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장은 대다수 판사들이 수도자에게나 어울릴 만한 엄격한 도덕성과 고도의 자기절제 속에서 행동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법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는데, 소수의 판사가 보통사람 정도의 도덕성과 자기절제만을 행함으로써 전체 사법부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식으로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말하자면 판사들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국민들이 이를 모르고 사법부를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관예우나 정실재판에서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법원장은 전관예우가 없는데 대다수 국민은 아직도 전관예우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잘못 믿고 있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재판의 결과가 정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데 국민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대법원장은 사정이 이러하니 판사들은 국민의 무지나 오해에 대해 너무 억울해 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판사가 언제나 잘해 왔고 지금도 잘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신뢰를 회복하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태도는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다. 대법원장은 사죄하는 척하면서 오히려 국민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리고 조관행 부장판사만 나쁜 판사로 만듦으로써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도마뱀’ 스타일의 생존전략을 쓰고 있다. 참으로 부끄럽고 유치하다.

최근 한 일간지의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전국민 10명 가운데 7명 정도가 우리사회에서 판결이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사회활동이 왕성한 40대의 경우 82.6%가 판결의 공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사법불신이 있다는 것을 대법원장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악의적인 여론조사라고 치부해버릴지도 모른다. 대법원장은 현재의 사법불신이 단지 몇몇 판사의 비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제는 몸통이다.  

사실 나는 조관행 부장판사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을 때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조 판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래도 고등부장까지 승진했을 때는 남부럽지 않게 유능했을 것이고, 특별히 도드라지게 비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 판사들이 받는 만큼 전별금 받았을 것이고 선물(?)도 받았을 것이다. 조 판사 스스로 생각할 때 그것이 범죄나 비리라고 생각지도 않았을 수도 있다. 조 판사 주변에는 아마도 조 판사보다 더 심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을 것이다. 더구나 조 판사는 쉽게 꼬리를 잡히는 식으로 어설프게 금품을 주고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너무 심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이 판사에 대해 국민이 느끼는 불신의 깊이이다.

이토록 심각한 사법불신은 소수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법부 자체가 비리의 덩어리이고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했을 때 생기는 것이다. 그 뿌리는 권위주의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어서 쉽게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명백히 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법불신은 사법부 내부의 자정노력으로는 해결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법비리가 있었고, 그때마다 대법원은 소란을 피우고 자체 해법을 내놓았지만, 사법부가 정화되는 기미는 없다. 자체 정화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비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제는 국민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리고 법원은 사법의 전 과정에서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이는 사법부를 국민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다. 재판과정, 징계와 인사절차 등에서 국민의 감시와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 모든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을 사법개혁이라고 한다면, 사법개혁과정 자체가 일반국민의 참여와 주도 하에 추진되어야 한다. 지금 대법원장이 고백하고 추진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사법부의 자정노력의 한계를 시인하고, 사법개혁과정 전반에 국민의 참여를 대폭 확대시키는 일이다.

이에 비해 대법원장이 제시한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구술주의와 공판중심주의를 충실히 실천한다면 오늘날 사법불신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여러 사회현상이 더 이상 발붙일 여지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한다. 구술주의와 공판중심주의의 실천이 중요하지만, 판사가 이것을 실천한다고 사법불신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한 것 아닐까? 국민참여 없는 구술주의와 공판중심주의는 판사의 권력을 강화하는 이외에 무슨 보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현재의 사법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판사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반대로 판사의 권력을 제약하고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사법부를 개혁해야 한다.  

결국 이용훈 대법원장은 문제의 소재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뒤돌리는 정책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2006. 8. 18자 로이슈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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