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애초에 성명서를 발표하기 위하여 작성했던 것이나, 성명서 발표 시기를 놓침에 따라 다소 수정하여 이 곳에 올립니다.
주권 상실을 선언한 노무현 정권의 퇴진을 촉구한다
국민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개시되고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어 온 한미FTA협상이 마침내 타결되었다. WTO로 대표되는 다자주의적 세계화가 장벽에 부딪힌 상황에서 오늘날 ‘제국’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 주도로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결정체인 FTA는, 이미 NAFTA에서 잘 드러났듯이 인류 공동체의 자기결정권을 부정하고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위에서 약육강식의 신자본주의와 가진 자들의 시장주의가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미국이 가장 강력한 FTA가 될 것이라고 규정한 데서 드러나듯이, 한미FTA는 한국의 입법권과 사법권 및 집행권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제약하고 국제인권규약에서 천명한 인민의 경제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한 채 경제의 대미종속성을 극대화하며,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의 생존 기반의 붕괴와 극심한 사회양극화를 야기할 것이 명백하다. 나아가 한미FTA는 국가권력의 제한이나 기본적 인권의 침해를 넘어서서 우리 헌법의 기본원리들을 부정하고 있다. 한미FTA는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권한을 대폭 제약함으로써 경제민주화의 원리와 정면 충돌하며, 스크린쿼터 축소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 정부의 반문화적인 정책결정은 궁극적으로 헌법이 천명한 문화국가 원리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미FTA가 경제협정임과 동시에 정치적·군사적 안보협정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유의할 때, 이는 단순한 통상조약에 그치지 않고 사실상 한국 경제의 미국경제에의 예속적 통합과 군사·정치적 종속의 강화라는 주권 침해적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4월 2일의 한미FTA 협상 타결 선언을 대한민국의 주권 포기 선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헌법의 어떤 규정도 정부에게 주권 포기를 선언할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고, 따라서 한미FTA 협상 타결 선언은 그 자체로 원천무효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국회 역시 주권포기조약의 비준에 동의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향후 전개될 국회의 비준동의절차에서 국회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FTA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쇄국주의자로 매도하고 FTA반대 집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며 FTA 반대 단체에 대한 재정지원 중단을 공언하는 등 위헌적 조치를 자행해 왔을 뿐 아니라, 모든 정부기관을 동원한 거짓 선전을 통해 이러한 주권 포기를 기만하고 은폐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은 이제 그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진보세력과 국민대다수의 의견에는 등을 돌린 채, 한나라당과 조선·중앙·동아 등 수구세력과 일치된 목소리를 냄으로써, 결코 참여정부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민주화를 보다 진전시키고, 인권의 신장을 가능하게 하며,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드높일 것으로 기대되었던 그 참여정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미FTA협상 타결이라는 주권 포기 선언은 더 이상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권이 정당한 정치권력이 아님을 분명히 확인시켜 준 것으로, 이제 나는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현 정권이 퇴진하여 조용히 국민의 심판을 기다릴 것을 촉구한다. 전략도, 비전도, 목표도 없이 오로지 타결 자체에만 목을 매단 채 미국의 요구에 따라 협상마감시한을 두 차례나 연장해 가면서까지 마지막 남은 한 줌의 기대조차도 미련 없이 내던져버리고 타결로 치달은 이 정부는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대국민담화에 나서서 정치적 실패를 무릅쓰고 한미FTA 체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변에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미FTA 협상 타결을 통하여, 여러 차례 그가 언급해 왔던 수구세력과의 대연정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지 않은가? 정치적으로 실패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한미FTA의 최대 희생자가 될 우리 국민들이다. 미선·효선의 죽음 앞에서 촛불 시위로 밤을 밝히면서 그의 집권을 지지했고, 수구세력의 탄핵광풍에 맞서서 대통령직을 지켜내고 나아가 열린우리당에 국회 과반수의석을 안겨주었던 진보세력과 우리 국민들이야말로 한미FTA협상 타결로 비참한 정치적 패배자가 되었으며, 이제 현 정권의 집권과 그 유지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한 데 대해 뼈저린 반성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다. 나는 한미FTA에 반대하는 많은 국민들의 의사가 국회 비준동의과정에서 관철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나아가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진정한 국민대표체를 구성하고, 우리 국민이 진정한 주권자로 당당히 자리잡는 새로운 체제의 건설에 나설 것을 제안한다.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정치권력을 응징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한미FTA협상 타결의 책임자들을 국민의 법정 앞에 세울 수 있도록, 우리 국민 스스로 당당히 정치권력의 주인으로 나설 때이다. 바야흐로 제2의 6월 항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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