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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7222
2007.03.16 (00:09:19)
출처: 한겨레21, 2007년 3월 2일 제649호

도요토미 히데요시 손해배상?


▣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2월15일, 미국 의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위안부’ 청문회가 최초로 열리기 며칠 전 한국 법원에서는 위안부와 같은 운명이었던 ‘강제징용 원폭 피해 노동자’의 손해배상 청구를 부인했다. 미국 의회에서 할머니들은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한국 법원에서는 “전쟁은 벌써 끝났다”고 판결했다.


원폭 피해 노동자도 개인 책임인가


미국 의회 청문회는 물론 7년을 끈 담배소송 1심 판결은 여러 신문에서 1면 머릿기사로 보도됐지만 마찬가지로 7년 만에 1심 판결이 난 원폭소송은 기껏 지방 단신으로만 다루어지거나, 아예 보도조차 되지 못했다. 어느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은 담배소송 1심 주심판사의 아버지가 골초로 폐암에 걸려 죽었는데도 주심판사는 그것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았다는 내용을 담았다. 원폭소송 1심 주심판사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일제 때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원폭에 피폭됐는지 여부는 알 수 없고, 설령 그랬다고 해도 그것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시효 10년이 지났기에 안 된다고 했으니 그 10년 안에, 즉 1955년 이전에 소송을 제기하지 못한 점은 역시 개인 탓으로 본 것이리라.



△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한-일 국교가 1965년에 수립됐으니 일본에 귀화하지 않는 한 1955년 이전에 재판을 할 수 없고, 심지어 관련 서류가 2005년에 공개됐으니 그전에는 알 수조차 없었어도 말이다. 위안부가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취업한 것이라는 일본 쪽의 주장도 그런 개인책임론에 속하리라. 그러니 죽기 싫으면 담배 끊어! 강제로 끌려가 원폭 맞기 싫으면 조선에 태어나지 말았어야지! 다 네 탓이야! 재판은 10년 안에 해야지. 법원이야 1심에 7년이고, 2·3심 다 합치면 10년이 훨씬 넘게 재판하는 게 관행이지만 말이야. 국교가 없었다고? 그럼 일본에 귀화해야지. 평생 가난하고 아팠다고? 그거야 개인 의지로 극복해야지! 이렇게 훈시하는 한국 법원은 일본 법원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담배소송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원폭 피해 노인들은 이미 대부분 사망했고 극소수 생존자들도 모두 80살이 넘은 중환자들이어서 어쩌면 이번 재판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더욱 가슴이 아프다. 특히 일제의 법적 책임을 묻는 마지막 재판이 될지도 모른다. 일본 재벌을 대리한 국내 최대 로펌이 주장한 민법의 10년 시효 주장에 대해, 노인들은 강제 징용과 피폭이라는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소멸시효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그것은 국제법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가해국인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원칙이니 피해국인 우리가 인정함에 문제가 없고, 더욱이 우리가 이를 부정하면 앞으로 일제 때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한 법적인 배상과 사죄를 일본에 요구할 수 없게 된다고도 주장했다. 7년 전 재판에서 판사는 그러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잡혀간 도공들도 지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느냐고 물어서 법정에 쓴웃음과 한숨이 일었다. 그리고 7년, 그 뻔한 판결에 왜 7년이나 필요했을까? 저 수십만 강제 징용자와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원폭 피해자,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많은 삶에 한을 더해준 7년이 아니었던가?


민법만 적용하려는 판검사들


이런 국제 사건만이 아니라 국내 사건을 다루면서도, 특히 인권·노동·환경·의료·교육 등을 다루면서도 언제나 민법에만 의거하는 판검사들이 있다.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는 민법의 시효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손해배상이 인정돼야 하는 것처럼, 노동자의 단체행동은 헌법적 인권 행사이기에 민법의 불법 행위 법리가 적용될 수 없으므로 손해배상이 인정될 수 없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판검사들도 있다. 그들은 긴급조치 적용 판검사들보다 더 무섭다. 긴급조치라는 것은 사라졌지만, 민법이라는 이름의 영원한 재산법이 수호하는 재산권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해 국제화와 다양화의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로스쿨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엄청난 학비가 들게 될 로스쿨에 진학할 수 있는 가진 자들의 자녀가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면 재산법으로서의 민법 수호에 더욱 적극적일 가능성도 있다. 법원이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민법을 이유로 들어,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 행위의 책임을 부인하고 일본에 대한 법적인 배상과 사죄를 더 이상 요구할 수 없게 만든 이번 판결은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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