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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9241
2001.09.05 (12:46:30)
시간은 참 잘 갑니다.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리듬만으로 일관되게 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합니다.

글을 안 올린지 벌써 두달이 다 되어 가는군요. 그 동안 개인적으로 어수선하고 또 분주한 상태였습니다.

그 동안 한반도와 남북관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요? 그런데 시솝 혼자 계속 글을 올리는 것은 무언가 좀 안돼 보입니다.

그래도 할 수 없이 다시 글을 올립니다.

안두희가 미국 CIC소속이었다는 보도가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오늘 그 CIC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기사가 나와 올려봅니다.

CIC는 해방 후 미군의 성격 즉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하는 논점에서 (물론 그 해답은 어느 한 축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집고 넘어 가야하는 문제 같습니다.

여기에는 안 나와 있지만, 참고로 말하자면 한국전쟁 직후 남한 전역에서 벌어진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배후에도 CIC가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시사된 바 있음)

연합뉴스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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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05 (수)
< '동물농장' 남한과 미정보기관 CIC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가  정보원(informer)을 거쳐 요원(agent)으로 활동한 것으로 밝혀진 주한미군방첩대(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는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무렵 단순한 정보기관이 아니었다.

    첩보와 정보 수집이라는 정보기관 본연의 업무 말고도 정치인을 포함한  민간인의 동태를 직접 인터뷰나 전화도청 등의 각종 방법으로 통해 사찰,  감시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정치공작에 이용했다.

    CIC가 어떻게 이런 광범위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미군정이 행정은 물론 입법, 사법권까지 장악했다는 데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관은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미국내 정보공개법에 따라 차츰 이와 관련된 문서가 공개되면서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다.

    CIC의 위력을 말해주는 증거로 흔히 이 기관이 한국전쟁을 예측한 사실을  들고 있으나 이는 CIC가 수행한 사업 중에서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CIC는 미군정을 뒷받침하는 중추기관이었기에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가 CIC  요원이었다는 대목은 그냥 보아넘길 수 없다.

    이 기관이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제가 패망하고 남한에 주둔한 미 24군단을 따라 1945년 9월9일에 남한에 들어와 거기에 배속된 제224 CIC파견대(the 224th CIC Detachment)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CIC는 1946년 2월13일 제224 CIC 파견대가 남한에 주둔한 전 CIC 파견대의 작전통제권을 장악할 때까지는 지역별로, 부대별로 각기 따로 노는 바람에  일사분란한 작전이나 정보 수집에 어려움이 있었다.

    제224 CIC는 2개월 뒤인 1946년 4월1일 971 CIC 파견대로 면모를 일신하면서 드디어 정보기관과 공작정치의 본산이라는 막강 권력기관으로 발돋움한다.

    이런 면모는 CIC 지부 및 분소 설치 현황과 971 CIC 파견대 조직체계를 보면 잘 드러난다.

    1948년 12월 현재 미군 헌병사령부의 범죄수사단(CID) 지부가 서울과 부산,  인천의 3곳이었던데 반해 CIC는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에 거점을 둔 13개  지부,  6개 분소를 두고 있었다. 바야흐로 남한 전국을 장악한 것이다.

    이 때 지부와 분소 설치 도시를 보면 서울(의정부).인천.강릉(삼척).대전.부산(마산).광주(목포).전주(군산).대구(포항).제주도.개성.옹진.춘천.청주였다.(괄호 안은 분소)    여기서 주목할 것은 38선과 인접한 곳에 지부와 분소가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만큼 대북활동에 주안점을 두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단순 숫자만을 비교해 볼 때 9개 지부 3개 분소였던 1946년 9월과 비교해도  많은 양적 팽창을 엿볼 수 있다.

    CIC의 성장은 인가.보직인원수와 조직에서도 드러난다. 1946년 4월 971  CIC파견대가 제224 CIC를 대체했을 당시 인가 인원은 126명이었다. 하지만 이 때    실제 여기서 일한 인원은 57명이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9월에 89면으로 증가했다.  인가된 숫자와 실제 근무인원에 꽤 큰 격차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부대장은 중령급으로 인가가 나 있었으나 실제 중령이 임명된 것은 1948년  2월에 가서야 가능했다.

    조직은 1946년 4월 이후 대폭 보강,증설되기 시작했으니 처음 부대장    예하에 작전장교와 행정장교, 연락장교, 각 지부 및 그 아래 분소로 구성되었다가 1947년 3월19일 현재는 과(課).실(室).대(隊)만 13개에 달하게 된다.

    이 때 조직 편제를 보면 부대장 아래 ▲선임장교와 ▲작전장교 ▲각 지부가 3각 편대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선임장교 아래에는 부관과 보급과, 숙사과, 수송과, 급양과, 문서실이 배속됐다.

    또 작전장교 지휘를 받는 곳으로는 첩보.파괴.기타과와  정치과,  보고.분석과, 보안과, 특수대, 첩보과. 연락과, 작전문서과가 편제됐다. 또한 부대장 직속인 지부로는 서울.인천.송도.대전.청주.대구.광주.부산에 설치됐다. (그래픽 참조)    CIC의 이런 성장은 곧 이 기관이 남한 전국을 그물망처럼 장악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철저한 통제 시스템은 식민강점기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와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요컨대 CIC라는 서슬퍼런 정보공작기관을 앞세운 미군정 치하 남한은 평등을 부르짖었지만 전혀 평등을 구현해내지 못했던 조지 오웰의 지난 50년대 풍자 소설 '동물농장'격이었던 셈이며, 백범 김구 또한 결코 이러한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taeshik@yna.co.kr (끝)

  2001/09/05 11:29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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