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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7998
2007.10.04 (23:25:45)
이 글은 배재대학교 학보 2007. 10. 1자에 실린 것입니다.

판사공화국, 대한민국


2007년 9월 헌법이 개정되었다. 놀랍게도, 1948년 건국헌법 이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제1조가,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이 이렇게 바뀌었다. “① 대한민국은 판사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판사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판사로부터 나온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87년 이후로 우리 헌법은 개정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일 뿐 판사들의 나라는 아니라는 어느 신문의 칼럼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형식적 헌법 개정은 없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헌법이 바뀌었다는 게 문제다.

지난 9월 6일 서울고등법원 제10형사부는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에 대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사건 항소심 판결에서 징역 3년을 선고했던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과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이로써 회사 돈 900억 원을 횡령하고 계열사에 2,000억 원의 손해를 끼친 범죄인 정 회장은 구속된 후 겨우 2개월 감옥생활만 한 채 풀려났다.

재벌총수에 대한 법원의 솜방망이 선고가 물론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0년 1월 이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혐의로 기소된 기업인 149명 중 83.9%(125명)가 1심 아니면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것은 이 땅의 판사들이 가지고 있는 기업범죄에 대한 관념을 집행유예 선고 이유에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가 거론되었지만 그 핵심은 두 가지다.

과거에 비자금 조성 관행이 있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다. 말하자면 과거의 비자금 조성 관행을 이유로 범죄에 대한 양형을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 다 그랬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2월 두산그룹 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보고 화이트칼러범죄의 양형이 지나치게 낮다고 비난했던 대법원장의 발언마저도 공공연히 무시될 만큼 상황은 심각하다. 앞으로 어떤 재벌범죄도 과거 관행이 존재하면 실형을 선고할 수는 없으니, 바야흐로 재벌범죄의 해방이 도래한 셈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규모 등에 비추어 비자금 조성을 이유로 한 다른 처벌사례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재벌그룹 회장이 아니고 일반 기업체의 경영자가 같은 일을 했다면 당연히 실형을 선고했으리라는 것이다. 즉 법원이 범죄에 대한 양형을 할 때 그 범죄인이 재벌그룹 회장인지 아닌지가 당연히 고려되어야 함을 이 판결은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법정에서 재판장은 ‘실형을 선고하면 경제가 위기에 처한다’는 논리까지 동원했다. 중대한 경제범죄를 저지른 자는 경제를 위해서라도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일진대, 법원은 상식과는 담을 쌓은 모양이다.

사회봉사명령의 내용은 점입가경이다. 2시간 이상 전경련회원이나 경제인을 대상으로 한 준법경영 주제의 강연 실시, 국내일간지와 경제전문잡지에 준법경영을 주제로 한 각 1회 이상의 기고가 그 첫 번째 내용이다. 경제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경제범죄를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주제로 강연과 기고를 시키는 꼴이다. 제 정신이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버젓이 하는 사람이 판사라는데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 회장이 약속했다는 8,400억 원 상당의 사회공헌을 성실히 이행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취소할 수도 있단다. 자기 스스로 사회공헌을 하겠다고 한 내용에 대해서 굳이 사회봉사명령을 내리는 이유는 뭘까?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사회봉사를 하면 된다는 이야기인가? 정 회장의 사회공헌약속은 집행유예판결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고, 실형이 선고되면 그 약속은 없던 일이 되는 것이었을까? 그 약속을 이행시키기 위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인가?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

이 판결은 판사들의 몰상식과 오만을 그야말로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느 경우이건 이런 자들에게 우리 권리의 실현 여부를 맡겨 놓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자, 사정이 이 정도 되고 보면, 대한민국은 판사공화국 아닌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판사에게 있지 않은가?

닷새 후 이 점은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아들을 폭행한 유흥업소 종업원을,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납치·감금·폭행한 죄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던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역시, 9월 11일 항소심에서 200시간의 사회봉사 이행을 조건으로 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번에는 부정(父情)이 앞서서 범행을 저지른 점을 참작했단다. 참으로 관대한 법원이 아닐 수 없다.

법원은, 폭력배를 동원하였지만 이들이 유흥업소종업원들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이는 유흥업소 종업원들이 폭력배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까지 곁들인다. 이 정도면 판결이 아니라 소설이다. 이것이 판결이 되려면 “김 회장이 폭력배를 동원한 것은 종업원들을 심리적으로 무력화시킨 상태에서, 본인이 직접 가해 종업원을 폭행하여 아들이 당한 보복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을 담았어야 한다.

이 판결은 매우 간단하지만 정 회장 판결과 비교해보면 한층 세련되었다. 재벌그룹 회장에게 요구되는 준법정신을 고려하면 죄질에 상응하는 형사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양형에서는 아버지의 정을 내세워 집행유예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양형에서 재벌회장이라는 요소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처럼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회장이 아니라 그냥 여느 가정의 아버지가 같은 일을 저질렀어도 집행유예로 나올 수 있었을까? 결국 재벌회장이라는 점이 핵심이고, 이것이 상식이다. 9월 20일 보복폭행 사건 은폐·축소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한화 상무와 폭력조직 두목에게 실형이 선고됨으로서 이러한 상식은 여실히 입증되었다.

회사 돈 떼먹은 재벌회장을 감옥에 보내면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거나,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사회봉사를 하면 된다거나, 아무리 죄질이 무거워도 재벌회장이 저지른 범죄면 봐 줘야 한다는 말을 내놓고 하는 사람이 버젓이 판사를 하는 나라,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몸통’은 빠져나가고 ‘깃털’만 감옥 가는 나라, 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 대한민국을 판사들이 휘젓고 있다.

그렇다고 판사공화국인가? 오히려 재벌공화국 아닌가? 실제로 풀려나오는 것은 재벌이 아닌가? 그래도 재벌회장은 집행유예와 사회봉사라는, 어쨌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그 판결은 바로 판사들이 선고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재벌공화국이 아니라 판사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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