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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8945
2003.05.24 (09:52:50)
윗글을 풀어서 써 본 것입니다. 특히 DJ의 정상회담과의 비교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어떤 신문도 어떤 학자도 그 부분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더군요.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 실린 것입니다. 기고 성격상 언론비평의 형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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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간의 신뢰회복 무엇을 위한 것인가?
<참언론 참소리 19>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보도의 문제점

무엇을 위한 신뢰인가

한미정상회담에 관한 주요 신문들의 보도와 논평은 그 중요성에 비해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그들이 주로 내세운 것은 한미간의 신뢰회복이었는데, 무엇을 위한 신뢰인가 하는 점에 대한 고민이 빠져버렸다.

평화와 상호존중이라는 원칙에 대한 신뢰가 없이 그저 당장의 이익에 따라 결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신의라기보다 야합일 뿐이며 결국에는 모두에게 불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간의 신뢰관계와 동맹관계의 목적이 한반도의 평화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미간의 신뢰회복이 한반도의 평화에 얼마나 기여하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주요 언론들은 거의 답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점에서 이번 정상회담은 오히려 후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 본토의 안전, 그리고 남한만의 안전과 같은 개념일 수 없다. 한반도 평화는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과 북 사이의 적대감과 불신의 해소에서 올 수 있을 터인데, 언론에서는 북한을 적대시하는 한미간의 동맹이 강화되었으므로 이제 한반도가 보다 평화로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적대의 강화와 평화의 강화는 모순이다.

북한의 피해의식을 완화시켜주는 데에 실패하였다

북한의 핵개발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1992년에 남북간에 체결된 한반도비핵화선언에 반하는 것임에도 틀림없다. 하지만, 북한에게만 책임을 씌우는 것이 공평한가?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바른 일인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멸과 호전성 그리고 핵을 포함한 군사적 위협을 도외시하고 어떻게 북한만이 한반도 평화의 위협 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북한은 자신의 핵개발은 방어적 성격의 것이며, 미국의 적대행위가 철회되고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핵개발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겠다는 뜻을 누차에 밝혀 왔다. 미국이 한반도 평화를 선언하면 북한도 그에 동참하겠다는 것이다. 한반도 사태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미국은 왜 그러한 평화 정책을 마다하는가?

미국은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유화책은 북한의 무법정권을 연장시키는 것이며, 그것은 평화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키는 결과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의 주요 언론도 그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북미간의 현대사에 대한 편향된 인식이다.

1994년 제네바합의가 체결된 이후 과연 북미간에 어느 쪽이 보다 불성실하였는가? 2000년 북미간의 역사적 공동성명이 반년도 못 가 휴지조각에 불과하게 된 것은 과연 어느 쪽 책임인가?

이번 정상회담의 보도의 문제점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북한에는 엄격하고 미국에는 관대한 우리 주요 언론의 지병(持病)이 다시 도진 것이다. 북미간의 적대관계에 대한 미국 쪽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는 것이 또 다른 편향이라고 한다면, 하여튼 북미간의 문제는 상호 불신과 적의(敵意)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북한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모두 자위(自衛) 내지 자기보호를 위하여 군사적 대응을 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서로 상대가 적대적이며, 자신은 정당한 방어태세라고 주장하는 이 모순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미의 동맹관계가 진정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그 동맹이 북한을 위협하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 파트너로서 평화과정에 동참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그 점에 관해 적지 않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테러전쟁이 수행되던 2002년 2월 부시가 방한하여 이루어진 정상회담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설득으로 부시는 자신들이 먼저 북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한 북핵사태가 악화된 2003년 1월의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의 공동성명에서도 미국은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거나 침공할 의사가 없으며, 북한이 핵을 개발할 안보상의 근거는 전혀 없음을 보증하였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도 그와 같은 평화 이니셔티브가 있었어야 한다. 즉 미국의 호전성에 대한 북한의 피해의식을 완화시키고, 그 의구심이 근거가 없음을 확약해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공동성명은 물론, 양국 정상의 어느 입에서도 그런 문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을 일방적으로 죄인 다루듯이 하였으며, ‘추가적인 조치’라고 하여 위협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간의 신뢰회복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신뢰’가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대치상태와 비극적 상황을 완화하고 종식시키는 데에 과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언론들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한미간의 신뢰회복 그 자체가 절대선인 것처럼 그저 찬양할 뿐이다.

대화의 가능성을 너무 줄였다

우리 주요 언론의 또 하나의 문제는 평화적 해결이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굴욕외교라는 비판에 대하여 가장 시급한 문제인 전쟁반대에 대한 확답을 받았으므로 성과가 있었다고 항변한다.

그것은 성과일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옵션을 치워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국의 일반적 군사전략인 선제적 방어공격(preemptive strikes)의 전술은 언제라도 다시 북한 문제 해법에서 대두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여튼 전쟁반대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노력이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더 문제인 것은 북한과의 대화가 빠졌다는 점이다. 빠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가능성을 우리 쪽에서 나서서 배제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왔다는 것이다. 평화적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당사자간의 대화와 타협이다.

대화가 있으면 근거없는 불신과 적의는 완화될 수 있다. 반대로 대화가 없으면, 불신과 적의는 주관적인 상상 속에서 증폭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물론이고 평화적 해결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도 대화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오히려 대화의 통로였던 남북관계조차 북한 핵문제와 연계하겠다고 하여 상호 소통의 여지를 더욱 줄였다.

물론 우리 정부는 인도적 지원은 핵문제와 관계없이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나, 예컨대 기간산업을 돌리는 데에 필요한 전력공급은 막아 놓고 또 중유공급마저 중단한 상태에서 다만 얼마간의 식량만 제공하는 미국식의 인도적 지원이라면 그것이 불신과 적대감의 해소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이었다. 부시 대통령과의 신뢰회복에 열중하여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북한 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일관하였다. 미국에 가서 될 수 있는 대로 미국의 체제와 지도자를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국에 가서 북한을 강력하게 비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북한을 비난하려면 차라리 국내에서 혹은 남북회담에서 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가뜩이나 북한과 심각한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에 가서 북한을 매도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는다.

물론 말로는 민족공조를 외치며 실제 행동은 남한 정부의 입지를 좁히기만 한 북한의 처사에 대하여는 마땅히 비판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여야 할 것이다. 또 바로 그러한 북한의 어리석음과 자기중심성 때문에 남한으로서는 미국 쪽에 더욱 가깝게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될 수 있다.

남한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에 대한 비판 혹은 미국 쪽으로 가게 된 것이 북한 탓이라고 하는 항변은 좋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하여 그렇게 노골적인 비난을 할 일은 아니다. 우리가 나서서 불신을 악화시킬 이유는 없는 것이다.

북한 고사작전?

그것은 단지 외교상의 결례를 넘어서 평화적 해결의 요체인 대화의 가능성을 봉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큰 우를 범한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주도적 해결을 자처한 우리의 과제는 우선적으로 북미간의 불신과 적대감의 완화일 것이다. 즉 우리는 북미간에 상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또 가능하면 대화에 나서도록 중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번 방미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거꾸로 갔다. 오히려 우리가 나서서 북한의 대화자격을 부정해 버린 격이다. 이는 단순히 말실수라고 하기에는 중대한 문제이나, 우리 주요 언론들은 그 문제성에 대하여 천착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 불신과 폄하의 표명은 결국 미국 강경파들이 주문하는 북한 봉쇄 혹은 고사(枯死)를 통한 정권교체의 작전에 힘을 실어주게 될지 모른다. 북한 압박에 의한 정권교체가 과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인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강요된 정권의 붕괴는 곧 북한을 폭력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며, 그것은 결국 미국과 한국 그리고 어쩌면 주변국들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제2의 한국전쟁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물론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 정권교체의 전략에 찬성하지 않으며, 북한 정권의 변화의 가능성에 주목해 줄 것을 확실히 당부하고 왔다고 한다. 그것은 좋은 얘기이나, 애석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수차에 걸친 과격한 발언으로 벌써 미국 강경파에게 힘을 실어주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앞으로 남북의 대화조차도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갈지 모른다.

그러한 상황은 결국 미국의 봉쇄 혹은 고사 전략과 일치하는 것이니, 두렵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주요 언론들은 그러한 결과의 심각성에 대하여는 전혀 고려가 없다. 아무리 김정일 체제에 대한 증오와 정권 붕괴의 당위성에 취하였다고 하여도 대화의 단절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하여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2001년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바로 대화의 복원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즉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보는 것과 평화를 위해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라며,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기에 진력하였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대응법을 몰랐을까? 아니면, 이제는 우리 정부의 성의를 차버린 북한에 교훈을 줄 때라고 생각하였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회고

이미 몇 번 언급하였듯이 이번 정상회담은 김대중 정부시절의 정상회담과 비교하여야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요 언론은 물론이고 전체 언론에서 그러한 비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그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하여 보고자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 두 번의 정상회담을 하였다. 한 번은 2001년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 김 대통령이 미국으로 달려가서 한 것이고, 두 번 째는 2002년 초 부시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한 것이다.

첫 번째 정상회담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이 클린턴 정부의 정책과는 다를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유지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서둘러 방미한 것이고, 두 번 째 정상회담은 부시 정부의 강경책으로 북미간에 대화가 단절 된 지 1년이 넘은 상태에서 그리고 9.11테러로 미국의 군사전략이 바뀌는 상황에서 다시금 북미의 대화를 복원시켜보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그 두 정상회담은 모두 실패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특히 그 두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각고의 노력을 보였다.

첫 번째 정상회담에서 전임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파월 국무장관의 얘기로 희망을 품었던 김 대통령은 결국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만다.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에 대하여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고 말한 그 한마디가 아주 상징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은 방미 바로 직전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합의한 ABM이 세계평화에 긴요하다는 문구에 대하여 그것이 안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해명을 해야 했고, 또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시 한반도 평화선언의 채택은 없을 것이며 단지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후퇴하여야 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 자체는 상당히 선방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김 대통령 스스로도 ▲한미 동맹적 협력관계 확인 ▲햇볕정책 성과 인정 ▲남북관계에서 우리의 주도권 인정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지지 ▲제네바 합의 준수 등에 관해 완전한 합의를 본 것은 '큰 성과'라고 평가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말이지 대단한 내용들이 아닐 수 없다. 남북관계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것, 또 김정일의 답방을 지지한다는 것, 무엇보다 제네바합의의 준수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으며, 그러면서도 한미동맹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찌 대단치 않단 말인가?

물론 이후의 전개과정에서 위의 성과들은 실제로 실현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로써 그 정상회담의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 정상회담의 성과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셀리그 해리슨의 표현을 빌자면, 김대중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뺨을 맞고 오면서도 중요한 보물을 간수해 냈던 것이다.

2002년의 정상회담은 어떠했던가? 북미 대화가 단절되고, 더욱이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의 발언으로 북미간의 긴장과 적의가 고조되는 가운데, 김 대통령은 북미간의 대화의 복원과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진력한다. 당시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 대통령이 제시한 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확고한 한미동맹 ▲테러에 대한 반대 ▲대량살상무기(WMD)문제 해결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김 대통령은 특히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부시 대통령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를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나, 신뢰할 수 없다고 보는 것과 평화와 국익을 위하여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별개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전략으로 대응한다. 그리하여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침공하지 않겠다'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겠다' `인도적 식량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하게 한다.

물론 부시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변함이 없었고, 따라서 북한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었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은 없었다. 대신 중요한 이벤트가 있었는데, 바로 도라산 역에서 남북 철도 연결을 기원하고 부시 대통령이 직접 침목(枕木)에 사인을 하는 행사였다.

그 이벤트는 상당히 정교하게 기획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테면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한민족 분단의 아픔과 또 그 연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기획된 것 같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직접 사인한 침목이 경의선을 연결짓는 마지막 침목으로 쓰이는 것으로 되어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그 행사는 부시 대통령을 한반도 평화의 보증인이자, 주재자로 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김 대통령의 도라산 역 연설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김 대통령은 연설의 말미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주도해오신 각하께서 한반도 평화정착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한 지도자로서 한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되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라고 부시를 추켜세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북한 정권이 우리의 진지한 대화 제의에 하루속히 호응해올 것을 충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여 북한이 실기하지 않고 대화의 기회를 잡으라고 권고하였다.

비록 김대중 대통령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지만, 북한과 미국 사이에 끼인 ‘안팎 곱사등이’ 신세에서, 김 대통령은 나름대로 중재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즉 북미간의 불신의 완화와 대화의 복원을 위하여 헌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쟁반대, 핵불용’에 관한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을 실천해내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이다. 때로는 수모를 겪어가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또 양보할 것은 양보해 가면서도 평화에 대한 원칙을 견지해 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는 여러모로 비교되지 않을 수 없으니, 새삼 감상(感傷)에 젖게 되는 것은 비단 나의 개인적 소회일 따름인가?




<참언론대구시민연대 언론신경쓰기 칼럼 22>

참언론대구시민연대는 대구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언론개혁운동단체다. 지역사회 민주주의가 안착되기 위해서는 법제도적 장치 마련과 더불어 지역사회를 정비하고 발전시킬 참언론의 존재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참언론대구시민연대 언론신경쓰기 칼럼>은 지난 대선시기 <2002대선참언론대구시민연대 칼럼진>이 확대 개편되었다. <언론신경쓰기>칼럼을 통해 개혁을 거부하고, 기득권층과 유착 그들만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의 그릇된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사회 주요 이슈에 대한 올바른 해법을 제공할 예정이다.

정태욱님은 영남대 법대 교수입니다

자세한 문의 : 053-423-4315 / www.chamma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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