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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교수님의 법과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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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독일 문학

1. 괴테의 『파우스트』


괴테Johann Wolgang Goethe는 250년전인 1749년에 태어나 83년을 산 뒤인 1832년에 죽었다. 그의 생애에 미국이 건국되었고,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라 독일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무자비할 정도의 사회적인 무력감과 정체가 독일을 지배했다.

그러나 바로 이 시대에 칸트와 피히테가 철학을, 그리고 괴테와 쉴러가 문학을, 슐레겔이 미학을, 훔볼트가 언어학을 수립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가 정체되었기에 능력있는 자들은 오로지 내면을 파고 들었다. 괴테도 마찬가지로 내면세계로 빠졌다. 이것이 바로 독일의 문학과 사상에 깊히 베인 관념성 바로 그것을 낳았다.  

1772년 23세의 괴테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신참 변호사로 고향인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 하나의 형사재판이 벌어졌다. 가난한 군인의 딸인 하녀가 성폭행을 당해 사생아를 낳고 죽였다. 법정에서 그녀는 <사람들의 모욕과 비난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죽였다>고 진술했으나 정말로 아이를 죽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여하튼 그녀는 사형 당했다.

괴테는 그 재판과 사형의 산 증인이었으나, 그것에 직접 관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바로 그 해부터 『파우스트Faust』를 쓰기 시작했다. 파우스트는 자신이 타락시키고 사생아를 낳게한 그레트헨이 사형을 받기 전 메피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구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도움을 거절하고 죽어간다. 『파우스트』 제1부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로 끝난다. 비극적인 운명에도 불구하고 순결한 그레트헨이라는 인물을 창조하여 괴테는 실제 사건의 공범이라고 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형당한 하녀와 그레트헨의 인생은 유사한 점이 없으나, 그 하녀와 같은 영아살해범은 지금도 많고 그 하녀를 재판한 재판관과 같은 남성 재판관도 역시 많다. 여전히 남자는 여자를 종속하고 억압하며 여성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괴테는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메피스토텔레스의 입을 통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률이라는 것은
  영원한 병처럼 유전되어 가지.
  시대에서 시대로 느릿느릿 전해져서
  고장에서 고장으로 서서히 옮아가는 걸세.
  도리가 불합리로 바뀌고, 어진 정치가 악정이 되기도 하지.  
  말세에 태어난 것이 탈일세!
  그리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권리인데,
  유감스럽게도 지금껏 문제도 되지 않는다네.  
  (각주: 곽복록 역, 박문서관, 1983, 64쪽. 단 저자가 일부 수정했다.)




2. 카프카

카프카와 법


카프카는 법학을 공부했다. 왜?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법학 시험을 치루면서 <무의미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시간을 죽였다고 했다(각주: 안경환, 위의 책, 56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카프카에게 법에 대한 성찰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도 법은 비판의 대상이었고, 인간 실존의 억압적 구조를 상징하는 우의적 대상이었다.

나는 카프카를 비롯한 작가들이 반드시 사상의 입장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적어도 그런 입장에서 다루려고 하면 그 작가가 생전에 영향받은 사상과 연관지어 그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카프카가 마르크스를 읽은 적도 없는데 마르크스를 그의 작품에 무리하게 대입하거나, 그가 어떤 종교도 믿은 적이 없는데 종교를 무리하게 원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각주: 예컨대 김성진은 『아메리카』(삼성당, 1970) 해설(285-286쪽)에서 “카프카의 세계는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천국과 지상을 엮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신을 따라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신이 없는 신학”이라는 식으로 해설한다. 천국과 지상을 엮는 방법을 모르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또한 위의 책은 카프카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석을 ‘상투수단을 써서 아전인수격으로 이론을 날조하는’ 것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위의 해설이 1970년도에 나온 것임을 고려하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나 최근의 이해도 그리 다르지 않다. 내가 읽은 범위에서 이런 해석은 1950년대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박종서 역, 『심판』, 박영사, 1958(『소송』이라고 번역함이 옳다).
그런데 최근 『카프카전집』이 간행되면서 카프카의 문학을 그 ‘문학적 모태인 체코의 역사와 문화가 그러했듯이, 동양과 서양 사이를 넘나드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인상깊은 정신적 가교로서 새로운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는 견해가 나왔다(이주동 역, 카프카전집 1, 솔, 1997, 5쪽). 그러나 체코의 역사와 문화가 동서양을 넘나들었고 카프카도 그러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여기서 카프카에 대한 넘쳐나는 해석의 바다를 헤엄칠 생각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인 종교적 또는 심리적 해석 내지 모더니즘적 해석은 유아론에 젖어 있고(각주: 한국에서의 카프카 이해에 대해서는 이충섭, 한국인의 눈에 비친 카프카, 1955-1989, 한나라출판사, 1993. 참조),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자의 해석은 카프카를 자본주의 비판가라고 하면서 사회주의를 옹호한다. 그러나 나는 카프카를 그 어느 체제에서나 문제가 되는 권력지배의 문제를 해부한 작가라고 이해한다. 견강부회라고 해도 좋다. 나는 카프카를 아나키스트 작가라고 규정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카프카 생애에서 볼 수 있는 아나키즘과의 관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각주: 우리 나라의 번역서에 나오는 카프카 해설에는 아나키즘은 물론 사회주의와의 관련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신 그의 생애는 아버지, 직장, 연애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그의 문학도 초현실주의 등으로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양 소개됨이 보통이다. 예컨대 김성진 역, 위의 책, 232쪽 이하).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카프카 생애에 대한 자료는 제한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인 클라우스 바겐바하Klaus Wagenbach는 그의 『카프카Kafka』(각주: 전영애 역, 기린원, 1989)에서 16세에 카프카는 단호하게 사회주의로 전향했는데, 그것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로서 당시 그는 주로 게르첸, 크로포트킨 등의 아나키즘 저서를 탐독하였다고(각주: 위의 책, 43쪽) 밝혔다. 그 당시 카프카는 그 뒤 체코공산당 형성에 중추가 된 좌파 아나키즘 그룹에 참여했고, 죽기전까지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또한 카프카는 16세에 이미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보어전쟁에서 대영제국에 대항한 보어민족에 대한 공감을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그 당시 창궐한 국가주의나 국수주의 또는 민족주의에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군국주의나 전쟁에도 반대했다.

바겐바하는 또한 카프카가 성인이 되어서도 바쿠닌, 벨린스키,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었으며(각주: 위의 책, 87쪽), 파리 코뮌의 아나키스트 리아뵈프Liabeuf의 처형에 반대하는 강연회나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자유교육주의자인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의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벌금을 물기도 했다(각주: 위의 책, 86쪽)고 밝히고 있다. 또한 카프카는 제1차 세계대전 몇 년 전에 수많은 체코의 아나키스트들과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독일의 자유학교 창설자인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각주: 위의 책, 88쪽)고 한다.

카프카는 24세부터 40세까지 보험회사, 특히 25세부터는 15년간 산업재해 보험회사에 근무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는 언제나 노동자들의 편이었고 현재 그들이 받는 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으나 그들이 너무나도 수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20년부터 죽기 전 4년간 카프카와 사귄 야노욱흐Gustav Janouch가 쓴 『카프카와의 대화Gespräche mit Kafka』(각주: 전희수 역, 신양사, 1969: 정규화 역, 녹진, 1988. 후자는 증보판의 번역이다)에서 카프카는 아나키스트들이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을 만치 사랑스럽고 친밀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각주: 전희수 역, 위의 책, 71쪽:정규화 역, 위의 책, 111쪽). 카프카는 고드윈, 크로포트킨, 터커, 톨스토이 등 아나키스트들의 생애와 사상에 심취했다(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116쪽). 야노욱흐에 의하면 카프카는 자본주의의 착취구조, 특히 테일러주의를 거듭하여 비판했다. 카프카는 아나키즘을 연구하면서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조직하는 계획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다.

카프카는 예술의 사회적 의의와 그것에 대한 국가의 포위를 명백하게 인식했다. 야노욱흐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는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인간에게 다른 눈을 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란 본래 국가의 위험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변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국가와 그의 모든 충복들은 그대로의 지속만을 원하고 있지요.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183쪽)



카프카는 아나키즘 사회주의에 공감했으면서도 그들을 믿지는 않았다. 혁명이 일어나도 결국은 국가에 의한 관료제가 지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야노욱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으로 혁명적인 모든 발전의 종말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인간이 나타납니다.… 홍수가 넓게 퍼지면 퍼질수록 강물은 더 얕아지고 더욱 흐려집니다. 혁명이 증발하면 나중에 남는 것은 새로운 관료정치의 진흙뿐입니다. 괴로운 인류의 쇠사슬은 관청용지에서 생겨납니다.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156쪽)



나는 여기서 섣부른 카프카 문학론을 전개할 생각이 전혀 없으나, 카프카의 작품은 아나키즘의 입장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곧 그의 모든 작품은 거대한 국가에 짓눌린 인간의 고뇌를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인간이란 병들고 힘없는 존재로, 그런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두렵고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허무주의를 견지했다. 그는 인간성의 타락, 이성의 말살, 보편적 진보에 대한 부정을 공감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변신』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아메리카』와 같은 작품에서 권력자와 그에 굴종하는 하층민을 대비하고 후자에 대한 지지를 보였다. 『아메리카』를 쓸 무렵 그는 자신이 고용된 보험회사에 대해 임금을 인상해 달라는 탄원서를 작성했으며, 노사분쟁은 그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사회현상이기도 했다.

카프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의 작품 『성』에서, 성은 천국으로, 그 주인공 K는 구원을 추구하는 순례자라고 여긴 막스 브로트Max Brot, 또는 전혀 반대로 성을 지옥으로 여긴 에릭 헬러Rrich Heller, 또는 그 둘을 혼합한 빌리 하스Willie Haas 등을 들 수 있다. 그밖에도 카프카를 마르크스주의자로 해석한 브레히트Bertolt Brecht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벤야민은 『소송』을 계급혁명을 위한 비유로 보았으나 동시에 신비적인 요소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는 루카치Georg Lucacs(그 역시 카프카의 모더니즘적 경향을 비난한다) 등등이다.

그러나 카프카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를 가장 절실하게 그려낸 작가로 이해하는 데에는 누구나 찬동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법을 비롯한 모든 외계와 단절되고 얼굴없는 관료적 메커니즘의 지배를 받는다. 카프카는 야노욱흐에게 산업의 능률주의와 분업제에 대해 그것은 노예화 이상의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폭력적인 불법을 행하게 되면 결국에는 악에 의한 노예화밖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뻔한 사실입니다. 모든 창조물의 가장 숭고하고, 가장 범해서는 안 되는 부분인 시간이 불순한 기업적 이해의 그물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창조물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창조물의 구성요소가 되는 인간이 멸시와 욕을 보게 됩니다. 이런 능률화된 생활이란 소름이 끼치는 저주로서, 여기서는 갈망했던 부와 이득 대신에 기아와 비참만이 생겨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멸망으로의 진전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적어도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확신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아무말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저 소리나 지르고, 더듬거리고, 헐떡거릴 수 있을 뿐입니다. 생활의 무한궤도가 인간을 어디엔가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은 생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물이고 물건인 것입니다.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150쪽)

    
그러한 인간소외는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존재했다. 과거에 사회주의자들이 그 소외란 사회주의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존재한다고 토론한 것   카프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검토는 임철규 편역의 『카프카와 마르크스주의자들』(까치, 1986)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
은 이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소외란 자본주의 사회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었음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설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간에 존재하는 계층화된 관료사회의 잔인성을 우리에게 절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분히 아나키즘적이다. 그의 소설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투쟁을 드러내거나 사회주의 사회의 무계급적 이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지향은 물론 그대로 드러나지 않지만 무계층 사회의 인간해방이라는 점에서 아나키즘적이다. 그의 작품은 그가 평생 혐오한 국가와 정부, 그리고 관료적 쁘띠 부르즈와에 대한 고발이다.

국가권력 비판으로서의 『성』과 『소송』

카프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왜 그를 이상하게 읽어 그를 신비롭게 만드는가? 나는 아주 쉽게 읽고자 한다. 예컨대 『성』은 정말 성의 이야기로, 『소송』도 진짜 소송의 이야기로 읽으면 어디가 덧나는가? 무슨 심리분석이고 종교적 이해인가? 게다가 사회주의적인 것이고 모더니즘적인 것은 또 무엇인가?

카프카는 평생 프라하에서 살았다. 프라하에는 성이 있다. 그것은 지금도 체코 정부청사이고 과거에도 체코를 다스리는 정부 청사였다. 따라서 그 성은 국가이자 정부다. 그래서 나는 <성>은 국가 또는 정부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너무나도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성』의 무대는 오세크라는 작은 마을이라고도 한다(각주: 강두식 역, 성, 여명출판사, 1994, 314쪽). 이러한 나의 생각이 유치하다고 해도 좋다. 나는 프라하에서 그 성을 보았고, 『성』은 바로 이곳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카프카는 국가 또는 정부 또는 권력을 두고 『성』을 쓴 것이라고.

그의 『소송』 역시 그야말로 소송의 이야기다.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법학도인 나는 그것을 정말 소송의 이야기로 읽는다. 주인공 K는 말한다. “죄가 없는데도 재판을 받을뿐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이 재판제도의 특징이다.” 그렇다. 우리의 재판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법은 무죄인가』라는 책에서 나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문학평론가들이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빌리 하스의 말이다.

카프카는 그의 위대한 소설 『성』에서는 천상의 힘, 은총의 영역을 묘사했고 또 마찬가지로 위대한 그의 소설 『소송』에서는 지하의 힘, 심판과 저주의 영역을 묘사했다.  
(각주: 임철규 편역, 위의 책, 58쪽 재인용)


『성』을 그렇게 해석한 것은 브로트 이래의 전통이다. 그래서 랑은 『성』에 나타난 <부질없는 노력과 시도는,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신의 은총이 인간의 의지나 자의에 의해 억지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스는 여기서 카프카를 키에르케고르와 파스칼에 비교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신비한 해석들이 무가치하다고 비판하나 그 자신도 그런 류의 해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각주: 임철규 편역, 위의 책, 58쪽 이하).

『성』은 권력에 대한 소설이다. 성의 주인은 권력자들이다. 그들은 국가의 기능과 개인의 운명에 대한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 한게를 설정하고 금지하며 규정하고 굴욕을 주고 통제하며 속이고 꾸물거린다. 무법체계의 정상적인 기능을 보장하고 동시에 그들의 활동을 통해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시간구조를 형성한다. 민중은 그냥 권력에 호소하고 간청하며 희망하고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거절당하고 허위의 약속만을 다짐받는다.

시간이 흐르듯 삶도 흐른다. 결국 희망과 지연의 미로 속에서 그들이 얻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세련되고 교묘하게 움직이는 권력의 끝없는 활동조직은 완전히 무용하게 돌아간다. 그 전제적인 권력은 저속하고 제멋대로이며 잔인하고 거만하며 변덕스럽고 추악하다. 그들은 악과 무분별한 세계질서의 필요도구이다.

그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인간은 더듬거리며 길을 찾으려고 애를 쓰며 움직인다. 유혹적인 작은 불빛이 가끔은 빛나기도 하나 그것은 기만과 환상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허사고 슬프며 사악할 뿐이다. 왜 인간은 인간을 억압하고 괴롭히는가? 아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나는 포기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악의 지배를 확신하나 악과 타협하지는 않는다.  

『소송』은 사회, 국가 및 종교의 조직이라는 가공할 만한 가면을 쓰고 있다. 마지막까지 주인공은 그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 K는 마지막까지 필사적인 저항을 하나 결국은 포기한다. 체제는 너무나도 강고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틀림없이 이 법정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언행, 다시 말하면 저와 같은 경우에서 말한다면 체포와 오늘 이 자리에서 받을 심문의 배후에는 커다란 조직체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커다란 조직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그네들에 대해서 무의미하며 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개 아무 소용도 없는 재판수속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이처럼 아무 의미도 없으니 관리들이 극도로 부패하는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읍니까?
(각주: 심판, 박종서 역, 위의 책, 76쪽)

  
여기서 묘사되는 법정은 아주 현실적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권력, 곧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인간을 압박하며 예속시키는 권력이다. 바로 카프카가 인식하고 증오한 부르즈와 세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은 결국 패배한다.  

올바르고 유일한 길은 현실에 만족하는 일입니다. 세세한 점을 일일이 개선할 수 있다 해도-그런데 이것은 쓸데없는 생각인데.-그것은 여러 가지 미래의 사건을 위해서 도움이 되겠지만 그 때문에 특히 항상 복수를 하려고 노리고 있는 관리들의 눈에 띠게 되면 한없이 손해를 당하게 됩니다. 그저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 제일이지요. 아무리 기분에 거슬려도 꾹 참아야 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재판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히 공중에 떠 있는 것이며 그런데서 자기 힘으로 무엇을 변경해 보려고 해도 그 때는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그만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한편 그 커다란 유기체는-전체가 다 얽혀 있기 때문이지만-사소한 장해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쉽사리 보충할 수 있으며 사실이 그렇지만 아무리 그것이 그 이상 더 굳어지고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더욱 엄격하고 사나워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 상태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힘써서 알아 두어야 할 겁니다.
(각주: 위의 책, 169-170쪽)

    
『성』과 『소송』은 권력 자체의 체제로서의 힘을 말한다. 여기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그 체제 속에 존재하는 내부관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는 전복될 수 없고 그 자체와 대결해야 한다. 이를 카프카는 야노욱흐와의 대화에서 게오르크 그로츠George Grosz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크 모자를 쓴 뚱뚱한 사나이가 가난한 사람들의 목덜미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뚱뚱한 사나이를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주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뚱뚱한 사나이는 일정한 조직의 틀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그는 조직 자체는 아니지요. 조직의 지배자는 더욱 아닙니다. 반대로, 뚱뚱한 사나이는 그림 속에서는 묘사되어 있지 않은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완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잘된 그림이 아니지요. 자본주의는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위에서 밑으로,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예속조직입니다. 모든 것이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세계와 영혼의 한 상태입니다.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198쪽)


『법 앞에서』(각주: 카프카전집, 위의 책, 225쪽 이하)는 그러한 체제를 상징하는 법이 화석화된 제도로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고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문지기는 권리를 추구하는 인간을 추방한다. 그래서 법은 더 이상 <권리를 위한 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다. 문지기는 말한다.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최하위의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갈수록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네.>(각주: 위의 책, 225쪽) 그런 문지기는 복잡한 법절차를 뜻한다.

『소송』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신이 아니라 권력들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법에 대한 도전은 없다. 세상에 있는 것은 법에 대한 비굴한 종속이다. K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더럽고 타락한, 보기에도 흉칙한 권력체제, 그리고 윤리적 세계질서를 농단하는, 속이 보이도록 닳아빠진 누더기 정의는 검은 옷을 걸친 신사들이라는 환상적인 풍자로 소름끼치게 묘사된다.  

K는 굳어진 몸으로 그네들 사이로 사이로 끼여서 걸어갔다. 그 때 그네들은 누구 한 사 람 매를 맞으면 셋이 다 얻어맞을 정도로 완전히 일체가 되어 있었다. 무생물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일체였다.
(각주: 위의 책, 297쪽)
  
그러자 한 남자의 손이 K의 목을 누르고 다른 남자는 칼로 K의 심장을 찌르더니 그것을 두 번이나 욱였다. 눈이 흐려졌지만 K는 두 남자가 마주 대고 바로 자기 눈 앞에서 최후의 결말을 노리는 것을 알았다.
<개 같은 자식!>하고 K는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모욕만이 남은 것 같다.  
(각주: 위의 책, 302쪽)


카프카는 부르즈와 세계를 생명이 없고 실제로 사멸한 세계로 보았으며, 그 속에 붙들려 기껏해야 개인적으로만 항거할 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명없는 존재로 여겼다. 여기서 개인주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카프카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들에게로 이끌고 더 이상 그들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삶의 법칙으로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를 신뢰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세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 세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는 인간을 공동사회로부터 떼어놓는 지적 노동을 그만두고 인간을 인간에게로 인도하는 수공업자나 농부가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갈 꿈을 꾸었다.

순수하고 명료한, 일반적으로 유익한 수공업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가구를 만드는 일 이외에도 이미 농업과 원예분야에서 일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관청에서의 강제노동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무슨 높고 훌륭한 사람들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더욱 외롭고 따라서 더욱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19쪽)


카프카는 자유인을 꿈꾸었다. 직업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자유인을 꿈꾸었다. 그것은 아나키스트 시인 월트 휘트먼이 쓴 『풀잎』의 세계였다. 카프카는 야노욱흐에게 휘트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자연과 자연에 명백하게 대립된 문명을 유일하게 우리를 취하게 하는 인생의 감정과 결합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모든 현상의 단기적인 지속을 눈 앞에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이란 죽음으로부터 남아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나는 예술과 삶을 조화시키는 그의 재능에 경탄했습니다. 오늘날에 볼 수 있는 기계세계의 가장 큰 힘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했을 때, 월트 휘트먼은 간호보조원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해야만 했던 일을 한 것입니다. 약한 자와 병자, 패배자를 도왔습니다.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218쪽)


그것은 또한 카프카가 오랫동안 몰두한 도교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는 『남화진경(南華眞經)』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모든 종교와 인생철학의 기본문제이자 중요문제라고 생각했다.      

생명을 통해서 죽음이 소생될 수는 없다.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죽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 죽음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들은 거대한 연관을 가지고 포함되어 있다.  
(각주: 정규화 역, 위의 책, 201쪽)


* 민주법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7-1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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