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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회 마당

박홍규 교수님의 법과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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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재판 영화 15편

재판 영화를 통한 세계 역사의 이해


1994년부터 9개월간 독일에서 방송된 <재판 - 역사 속의 법과 정의>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귀절이 있다.    

법은 거의 모든 것일 수 있다. 1775년까지 계속된 <마녀 재판>에서처럼 수십만 명의 인간을 몰살할 수도 있고, 1945년부터 1946년까지 계속된 <아우슈비츠 재판>에서처럼 끈질긴 노력의 결과로 수백만 명을 학살한 나치 범죄의 전모를 밝혀낼 수도 있다. …
법은 정말로 정의로울 수 있을까? 로마 법이 국가 반역자를 십자가형으로 처형하기를 원한다면, 나자렛 예수는 즉결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역사 속에서 힘(권력)이 정의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행사했던 적 역시 흔치않다.
이렇듯 역사 속에서 법과 정의는 자주 분열되었다. …
정의는 재판을 통해서 정말로 실현될 수 있을까? … 법이 정의에 이르는 길은 멀고 도달하기도 어렵지만, 몇몇 경우에서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유도해 낼 수는 있었다.

(각주: 크리스티안 마이어 외, 이온화 역,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푸른 역사, 1998, 5-6쪽)



이 기획에서는 30건의 역사적 재판이 다루어졌다. 우리는 그 중의 몇을 영화로 감상하고자 한다. 예컨대 잔 다르크 재판, 마녀 사냥, 모어 재판, 엘리자베쓰 재판, 당통 재판, 드레퓌스 재판, 뉘른베르크 재판 등이다. 역시 30건에 포함된 소크라테스 재판, 예수 재판, 갈릴레오 재판, 브란트 재판, 오펜하이머 재판은 영화로 볼 수는 없으므로(예수 재판은 영화로 볼 수 있으나 문학에서 다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뒤로 미룬다) 제3편의 <법과 문학>에서 설명한다. 30건 중의 나머지 19건은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진 것이 아니므로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화 또는 문학화되지 않은 재판, 예컨대 베이컨 재판 같은 것은 유사한 성격의 모어 재판에서 함께 설명하는 식으로 살펴본다.

또한 이 책에서는 위의 30건에 포함되지 않은 다수의 재판 영화를 감상한다. 예컨대 근대의 바운티 호 재판, 아미스타드 재판 등이다. 그리고 현대의 동경재판, 길포드 포 재판, 케네디 및 닉슨 사건 등이다. 마지막 둘은 재판이라기 보다도 사법에 대한 것이나 편의상 여기서 함께 살펴 본다.    

쟌 다르크 재판과 마녀 재판

지금은 세계 위인의 반열에 반드시 오르는 쟌 다르크는 재판사에서는 마녀로 사형당한 악독한 여죄수에 불과하다. 뒤에서 볼 소크라테스나 예수와 같이 그것은 오욕의 재판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똑똑한 여자들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서양 중세사 그리고 근대사에 그렇게 죽은 여자들은 30만명, 또는 9백만명에 이른다고들 한다(각주: 모리시마 쓰네오, 조성숙 역, 마녀사냥, 현민시스템, 1997, 194쪽 참조. 이 책은 우리 나라에 소개된 거의 유일한 마녀재판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과학사상사를 전공한 저자에 의해 쓰여진 탓으로 법제사의 측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세의 법제도 구조 속에서 마녀재판을 인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쟌 다르크를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책을 통해서는 그다지 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아이들을 위한 전기류가 대부분이고, 본격적인 전기나 연구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장 쉽고 재미있다. 그녀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은 많으나, 가장 대중적인 것은 약 40년전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미국 작품이다. 감독 플레밍Victor Fleming(1883-1949)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스칼렛과 함께 쟌 다르크를 영웅적 여성상으로 창조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아름다운 버그만이고, 영상까지 화려하여 중세를 재현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감은 빈약하나, 아카데미상 3개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쟌 다르크의 강한 영웅적 이미지와는 달리 영화의 그녀는 인간적인 유약성도 함께 보여주기에 더욱 감동적이다. 최근 쟈크 리베트Jacques Ribette(1928-)가 감독한 실험적인 영화 <잔 다르크Jeanne la Pucelle>(1993년)도 비디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28년 칼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1889-1968)가 만든 고전적인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1928년)은 비디오로 볼 수 없다.

서양 중세는 <암흑의 시대>라고 할만큼 전쟁과 살육, 반란과 폭력 그리고 대역병이 끊이지 않은 시대였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거의 쉴 새 없이 전쟁을 했다. 14세기 초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소위 백년전쟁이 계속되어 프랑스가 사면초가에 이르렀을 때 한 농민의 딸이 나타나 프랑스를 구했다.

당시의 프랑스는 국왕에 의한 통제도 없는 약소국이었다. 쟌 다르크는 잔인한 침략국으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라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국왕을 설득하여 군대의 지휘를 맡았다. 농민의 딸이 군대를 이끈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냉담했던 장군들도 <신앙이 무기>라고 부르짖는 그녀의 순박함에 감동하여 함께 싸워 영국에 승리했다.

순결을 상징하는 흰 갑옷을 입은 쟌은 깃발을 흔들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녀는 병사들을 고무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러나 그녀는 식민지 감옥에서 네루가 그 딸에게 보낸 세계사 편지에서 강조했듯이 최초의 민족주의자였다. 네루는 자신의 딸이 인도의 쟌이 되기를 바랐으리라. 쟌은 도탄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의 향토를 침략자로부터 수호하자고 호소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에게 유관순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그런데 그 호소는 당시까지 없었던 외침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봉건적 관념에 사로잡혀 민족주의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국가, 조국이라는 관념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바로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후 민족통일과 절대주의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은 그 패배로 인해 대륙에서 손을 떼고 해외진출로 전환하여 대영 제국을 추구했다.

그러나 농민의 딸이 민중에 미친 엄청난 영향에 국왕과 귀족들은 질투하여 그녀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녀는 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정부는 그녀를 구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종교재판에서 그녀는 마녀로 선고되고 악마의 도움을 받아 군사적으로 성공했다고 판결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신의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한 것이 교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이단자로 취급되었다. 재판관은 그녀를 온갖 수단으로 위협하고 고문하자 그녀는 굴복하고 <나는 약했다>고 후회하면서 <신앙 없는 삶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스스로 화형대에 올랐다. 그 훨씬 뒤에 로마교회는 그녀를 단죄한 판결을 철회하고 그녀를 성녀로 추앙했다.

종교 재판은 중세의 상징이다. 교회는 이단자와 지배에 반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혹한 수단으로 박해했다. 수천 명이 근거 없는 죄목으로 고문당했고 강요된 자백 이후 이단자로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 하나인 마녀 재판은 5세기부터 이단자처벌로 시작되었으나, 13세기 이후에는 학문적으로 정립되었고, 15세기 이후에는 대규모로 제도적으로 행해졌으며,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뛰어난 여성들이 이단자로서 수세기간 탄압을 받다가 해방되는 것은 최근에 와서 였다. 역사는 그렇게도 여성에게 가혹했다.  

서양 중세란 모든 생활을 기독교가 지배한 시대였다. 따라서 세속적-비교회적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1225년경에 만들어진 중세의 법전 작센스피겔에서는 <신이 법이다>라고 선언되었다. 마녀 재판은 400년에 시작되어 유럽에서는 1540년까지 이어진다.

미국에서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1692년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 재판을 다룬 영화가 니콜라스 하이터너Nicholas Hytner(1957-)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크루서블The Crucible>(1996년)이다. 아서 밀러의 1953년 희곡 <세일럼의 마녀들>(각주: 김윤철 역, 시련, 평민사, 1997)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현대의 마녀 재판인 매커시 선풍에 직접 관련된 밀러가 그것을 비판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기도 했다.

이야기는 근면하고 소박한 농부 존 프록터(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애비게일(위노나 라이더)과 불륜에 빠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애비게일은 주술까지 걸며 존을 소유하고자 하나 남자는 아내를 선택한다. 그러던 중 두 명의 소녀가 혼수 상태에 빠지는 사건을 계기로 지방 정부와 교회는 마녀 색출을 시작한다. 하이터너 감독은 <조지왕의 광기The Madness of King George>(1993년)에서도 궁정의 음모와 작태를 신랄하게 그린 바 있다.

영국 근대의 재판

<사계절의 사나이A Man for All Season>는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n(1907-98)이 감독하고 폴 스코필드가 주연한 토마스 모어의 전기 영화로 196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걸작이다. 진네만은 <하이 눈High Noon>(1950년),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1953년), <자칼의 음모The Day of Jackal>(1973년), <줄리아Julia>(1977년) 등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우리에게는 『유토피어Utopia』의 작가로 더 유명한 모어는 헨리 8세의 권력과 크롬웰의 음모에 고결한 신념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사형 당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볼 수는 없다. 1528년,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사랑하여 왕비와 이혼하고자 하나 로마교황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추기경은 모어에게 교황과의 중개를 요구하나 모어는 이를 거절하여 추기경의 분노를 사고, 왕은 교황으로부터 이탈하여 강제로 이혼을 하고 앤과 재혼했다. 그 뒤 모어는 대법원장이 되나 크롬웰의 권모술수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1535년, 사형을 당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을 따를 수 없었기에 죽음을 택했다.

헨리 8세가 통치한 38년간 공식적으로 180명이 사형 당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이단자 처벌은 훨씬 많았다. 그래서 그의 법정은 피로 물들었다. 반역법이 제정되었고 그것을 근거로 한 수많은 조작 재판이 이어졌다. 그리고 궁정은 간교한 자들과 부패한 신하들이 지배하는 기생충들의 집단 서식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영국은 유럽과는 다르게 변화했다.    

모어가 사형당한지 1세기도 지나지 않은 1621년, 역시 대법관이자 위대한 철학자였던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이 재판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이컨은 법률가로 출발했으나, 뇌물수수로 가혹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의 보수적인 왕당파적 태도 때문에 왕과 대립한 국회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과거 지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어가 유토피아적이고 사회비판적인 활기를 사회에 불어넣어준 반면, 베이컨은 학문의 비판적 기능을 약화시킨 열정없는 지식인이었다.    

영화 <엘리자베쓰>는 엘리자베쓰 1세Elizabeth 1(1533-1603)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 속에 나오는 스코트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1542-87)의 반역죄 재판은 영국 역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나, 우리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는다. 또한 크롬웰을 다룬 영화로 <풍운아 크롬웰Crowell>(1970년)이 있으나, 그다지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 앤 불린을 다룬 영화로는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1969년)이 있으나 비디오로 볼 수 없다.  

프랑스 근대의 재판

정치영화의 귀재라고 하는 폴란드의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1927-)가 만든 <단통Danton>(1982년)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민주주의자 단통과 독재자 로비스피에르의 갈등을 주로 담고 있다. 그런데 단통 보다 로베스피에르에게 호감을 갖는 프랑스인의 역사의식과 달라 미테랑 대통령을 비롯한 프랑스 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바이다는 혁명에 우롱 당하는 인간과 혁명의 본질을 물었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최대의 국가였던 프랑스의 경제는 계속 급성장했으나 정부의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왕과 왕비의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회는 신분제도에 묶여 소수의 성직자와 귀족들이 경제를 독점했고 시민들을 탄압했다.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3신분의 시민들은 오직 세금 부담에만 시달렸기에 평등과 자유, 그리고 영주가 갖는 봉건적 특권의 철폐를 희망했다.

1789년 5월, 역사적인 삼부회가 열렸다. 그것은 중세 이래의 신분제 의회였으나 175년만에, 정부가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토지세를 부과하고자 한 것에 대해 귀족들이 반발, 그 소집을 요구하여 열린 것이었다. 6월 중순 제3신분의 대표들은 부채의 탕감과 절대주의의 폐지 등을 요구했으나 왕은 거부했다. 그래서 7월, 제3신분만으로 <국민의회>가 열려 헌법 작성을 시작했다. 왕이 군대철수를 거부하자 7월 14일, 시민들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여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어 8월, 저 유명한 인권선언이 채택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강령이 되어 왔다.

혁명 초기 3년간은 입헌군주제였으나 1792년 4월, 지금은 프랑스 애국가가 된 <라 마르세이에즈>를 부르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참가한 의용병들이 국왕의 폐위를 요구했다. 이어 1793년부터 프랑스혁명은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공화국이 선언되고 왕과 왕비가 처형당했다. 그 길로틴 위에서 단통은 외쳤다. <유럽의 국왕들이 우리에게 도전해 올 것이다. 저들에게 루이의 목을 던져 주자!> 그러나 그 자신 다음해 같은 곳에서 사형 당할 줄을 그는 몰랐다.

국민공회는 당파로 시끄러웠다. 오늘날 우리가 좌·우파라고 하는 구별도 이 때의 좌석을 두고 생겼다. 과격파의 수뇌들은 혁명의 이상을 망각하고 단지 공포정치로만 치달렸다. 그 주축이 공안위원회와 혁명재판소였다. 의회는 혐의를 받은 자는 누구도 안전할 수 없는 공포의 혐의법을 제정했다. 쓰레기 운반차로 불린 사형수 수송차가 날마다 자갈길을 요란스레 달렸다.

단통은 공포정치를 끝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신문을 발행하면서 특히 <프랑스에 적대하는 외국과 대화로 유대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로베스피에르와 대립했다. 그리고 그는 국민공회에 비밀경찰이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다음 해, 국민공회는 단통을 체포하고 반혁명분자를 일소했다. 의회는 그 체포가 부당하다고 항의했으나 로베스피에르는 교묘한 연설로 의회를 설득했다. 재판이 시작되었으나 단통은 굴복하지 않았다.

재판에서 그는 부정부패의 혐의를 받았으나 자신이 재판을 받는 이유는 <자신이 성실하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행복과 정의를 위하여 독재와 싸우자>고 호소하여 민중을 감동시켰다. 그는 혁명재판소를 부정하나 의회는 새로운 법으로 그의 변론을 금지하고 그는 35세의 나이로 키요틴에 얹혀 사형 당했다. 그는 <나의 목을 모두에게 보여라. 그만한 가치는 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날 괴로워한 로베스피에르는 침대 속에서 <민주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 다음 해 국민공회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그것으로 혁명은 끝나고 반혁명이 닥쳐왔다. 소위 적색 공포에 은 백색 공포였다. 공회는 해산되고 그것에 반발한 시민폭동은 군인 나폴레옹에 의해 진압되었다.        
  
노예선 재판

서구 근대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은 노예사이다. 노예에 대한 영화는 많으나 그 재판을 다룬 것은 많지 않다. 먼저 노예선과 관련된 재판을 보자. 역사적인 재판 사건이 네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는 <바운티호의 반란Munity on the Bounty>이 거의 유일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걸작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1935년의 <바운티호의 반란>은 감독은 프랭크 로이드, 주연은 찰스 래프톤과 클라크 게이블이었다. 이 영화는 1962년과 1984년에 두 번이나 다시 만들어졌다. 전자는 <서부전선 이상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1930년)를 감독한 루이스 마일스톤Lewis Milestone(1895-1900)이 말론 브란도, 트레버 하워드, 리차드 해리스 등을 주연으로 하여, 후자는 로저 도널드슨Roger Donaldson(1945-) 감독이 멜 깁슨, 안소니 홉킨스, 로렌스 올리비에, 에드워드 폭스, 다니엘 데이 루이스  등을 주연으로 하여 만들었다. 이 두 작품 모두 비디오로 볼 수 있다.  

이야기는 1787년에 있었던 실화이다. 그해 4월, 바운티호가 타이티 섬에서 서인도제도로 아프리카 노예들의 식량인 빵나무 열매를 운반하던 중 함장의 가혹한 지휘에 불만을 품은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함장과 그를 따르는 18명을 보트에 태워 망망대해로 추방한다. 5일분 식량밖에 없는 함장 일행은 48일간의 표류 끝에 티모르 섬에 착륙하여 이듬해 영국으로 송환된다. 함장은 반란군을 소탕하고자 타이티 섬에 도착하여 잔류한 반란군을 체포한다. 그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으나 사면된다.

<바운티호의 반란>이 노예선을 운항한 백인 반란이었으나, <아미스타드Amistad>(1997년)는 노예선에 탄 노예 자신들의 반란을 다룬 영화이다. 1839년에 발생한 흑인 노예 반란 사건을 다룬 <아미스타드>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1947-)가 <내 생애 가장 중요한 영화>라고 했고, 모건 프리만, 안소니 홉킨스, 메튜 매커너히 등이 공연했다. 가장 감명깊은 장면은 한 흑인이 법정에서 더듬거리며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재판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보자. 흑인 해방 운동가인 테오도르 죠드슨(모건 프리만)은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기 위해 변호사 로져 볼드윈(메튜 메커너히)를 찾아간다. 부동산 전문 변호사인 볼드윈은 <노예는 재산>이라는 통념에 따라 재산관련 소송으로 생각하고 변호를 맡는다. 그러나 피고인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는 주장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볼드윈은 1심에서 승소하나 2심에서 패소한다.  
그러나 전반부의 노예선 아미스타드 호 위에서 흑인 노예들이 참혹하게 살상되어 반란을 일으키는 장면에 비해 후반부의 재판 장면은 백인 중심이어서 문제가 있다. 법정의 논란은 노예를 재산으로 취급해야 하느냐, 아니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아래 흑인들을 풀어주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는데, 후자로 결론이 난 것은 흑인 해방이 백인의 시혜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드레퓌스 재판

재판 영화로서만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세계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1937년의 <에밀 졸라의 생애The Life of Emile Zola>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조연남우상, 각본상을 받은 걸작이기도 하나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비디오로 볼 수는 없다. 감독은 윌리엄 디어트리, 졸라 역은 폴 무니, 드레퓌스 역은 조셉 실드크라우트였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 군대에서 반역행위가 발각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스파이 혐의를 받아 드레퓌스(1859-1935)가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그후 이 사건은 잊혀졌으나 3년이 지난 1897년 파리의 다락방에서 친구인 화가 폴 세잔과 공동생활을 하며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졸라가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나는 고발한다>한다는 공개 편지를 신문에 실었다. 졸라는 군을 <범죄집단>으로 불러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여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여론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확정 판결의 권위는 강력했으므로 특별법이 제정되어 1899년 재심이 행해졌다. 반면 반대 여론도 거세어 드레퓌스의 변호사는 숙소를 얻지도 못하고 법원에 가는 도중 총격을 당할 지경이었다. 변호사를 재워준 교수 부부는 그후 결국 살해 당했다. 드레퓌스는 10년으로 감형되고 10일 뒤 특사로 풀려났다. 이어 1906년 대법원은 그 판결을 무효로 했고 드레퓌스는 복권되었다.    

이 사건은 20세기의 중요한 사회운동과 사회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먼저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에 등장하는 작가나 학자들이 <지식인>이라고 불려졌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에서는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공화국이 1905년에 탄생했다. 그리고 드레퓌스 무죄 투쟁기에 <인권연맹>이 출현했다. 또한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가고자 한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반면 이 사건에 의해 불거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그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치사에 있어서 여론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위 영화나 그 비디오를 볼 수는 없으나 할라즈Nicholas Halasz가 쓴 <드레퓌스-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Captain Dreyfus, The Story of A Mass Hysteria(각주: Simon & Shuster, 1957: 번역은 황의방 역, 한길사, 1978)라는 소중한 문헌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동경 재판

1961년의 <뉘른베르크 재판>은 나치 전범을 다룬 영화이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주디 갈란드가 유태인으로 등장하고, 스펜서 트레이시가 재판장, 리처드 위드마크가 검사, 막스밀리언 셸이 변호사를 연기한다. 셸은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받았고 각본상도 주어졌다. 비록 상은 받지 못했지만 클리프트는 나치의 우생법에 의해 열등인간으로 판정받아 단종수술을 받은 희생자로 나왔다가 정신박약자로 몰리는 독일 청년을 연기하는데, 그의 리얼한 연기는 나치의 만행과 함께 언제나 기억될 것이다.

이 영화는 나치의 거두였던 게링 원수 이하를 재판한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 후 이어진 제2차 재판인 나치 법률가들을 다루고 있다. 그 재판장의 회고록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텔레비젼 드라마로 제작되어 크게 성공하자 다시 영화로 만든 것이 이 작품이다.

영화는 뉘른베르크 공항에 백발의 미국인 노신사가 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재판장을 맡은 다니엘 헤이우드 판사이다. 그는 이미 처형당한 나치 장군의 부인이었던 미망인 베르헐트(마를렌네 디트리히) 집에서 머물게 된다. 미국측 검찰관인 로슨 대령(리처드 위드마크)은 피고들이 히틀러에 영합하여 비인도적인 악법을 만들어 많은 독일인을 고통에 빠뜨렸다고 주장하나, 두 사람의 피고는 무죄를,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야닝그(버트 랭커스터)는 침묵을 지킨다.

야닝그의 제자로서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 롤프(막시밀리안 셸)은 독일측 변호사로서 역시 무죄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고들의 죄를 인정한다면 모든 독일인도 같은 죄인이어야 한다. 야닝그 피고가 법무부장관에 있었던 것은 나치의 법률이 정도를 벗어나 국민이 불행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검찰측은 증인으로 독일 청년 피터슨(몽고메리 클리프트)을 불러 그가 우생법에 의해 단종수술을 받은 희생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변호사측은 그가 정신박약자임을 증명하여 그 주장을 물리친다. 검찰측은 다시 유태인과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잔혹한 처벌을 받은 여인(주디 갈란드)을 증언대에 세운다. 그러나 검찰측은 그녀가 독일인이 아니라 유태인에 의해 범해졌다고 반론한다.

쌍방의 논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재판을 이용하여 독일측 여론을 연합국측으로 끌려는 움직임이 드러나나 재판장은 그것을 무시하고 공정한 재판을 하고자 노력한다. 결과는 의외의 중형으로 끝난다. 독일측은 결과에 불만이나 야닝그만은 재판장의 엄정한 태도에 감복한다.

다음 뉘른베르크 재판의 일본판인 동경 재판에 관한 영화를 살펴 보자. 고바야시(小林正樹) 감독이 만든 4시간 47분의 다큐멘터리 <동경 재판>(1983년)은 일본의 전범 재판인 <극동 국제 군사재판>의 속칭이다. 전범은 28명. 일본의 전쟁 도발 과정과 재판 과정을 찍은 필름 속에는 양민을 생매장한 남경학살도 포함되어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검사는 미국의 키넌인데 일본인이 찍고 편집한 탓인지 비정하게 묘사된다.  

1998년에 제작된 <프라이드 운명의 순간>은 동경재판, 특히 그 주범인 도죠 히데키를 침략 전쟁을 미화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동경 재판>과 우리 나라에서는 상영되지 않아 다행이나, 최근 일본의 우익화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 공화국 군 재판

1994년도 아카데미상은 미국의 <쉰들러 리스트>와 영국의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대결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전자가 대부분의 수상을 휩쓸고 후자는 후보에 오른 7개부문, 곧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어느 것 하나 수상하지 못했으나 이미 베를린영화제의 작품상을 받은 바 있으므로 헐리우드의 영국영화 무시는 결코 공정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쉰들러 리스트>는 새로운 소재를 특별한 연출기법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다. 소재도 진부했고 문제의식도 새롭지 못했다. 유태인이 지배하는 헐리우드의 반나치주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유태인학살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모국이라고 하는 영국에서 벌어진 반민주적, 반인권적 권력남용에 대한 고발의 영화이다. 그것이 어떤 보잘 것 없는 부자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그것은 실화이다.

충분한 이해를 위해 북아일랜드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일랜드섬은 상당 기간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1921년에 아일랜드의 남쪽이 아일랜드국(에이레)으로 독립하고 나서 북쪽은 그대로 영국의 일부로 남았다. 그후 북쪽에서는 주민의 다수파인 프로테스탄트계와 소수파인 가톨릭계 사이에 차별대우문제를 두고 분쟁이 벌어졌고 그것은 1969년 이후 폭력화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특히 70년대부터는 남북아일랜드의 통일을 주장하는 가톨릭교도 중심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테러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폭탄테러사건이 빈발하게 되었다. 1974년 10월에 발생한 <길포드 포> 폭탄 테러 사건도 그 하나로서 당시 테러범으로 누명을 쓴 건달청년 제리 콘론이 15년이 지난 1989년에 석방된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의 소재이다. 콘론은 석방후 <증명된 무죄>라는 책을 썼고 영화는 그것을 토대로 한다.

당시 길포드에 있는 한 선술집에서 폭탄이 터져 5명이 죽고 50여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영국 경찰은 IRA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4명의 용의자를 구속하여 구타, 살해 위협, 고문을 가했다. 유일한 증거는 자백이었고, 콘론의 아버지와 조카도 공범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1975년 실제 범인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진범인을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길포드 포를 구하려는 술책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0년 아버지가 옥중에서 결핵으로 사망한 뒤에도 아일랜드 가톨릭 수녀인 사라가 구명운동을 벌였다. 1987년 영국 정부는 마침내 재조사를 실시하여 1989년 자백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해 10월 석방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의 수사, 재판, 교도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나오는 그것들보다 훨씬 못하다. 엄청나게 긴 수사기간, 유례가 없는 보호실과 유치장의 존치, 고문에 의한 거짓자백의 조작, 그것을 그대로 믿는 재판의 오류, 원시상태를 방불케 하는 교도소의 실정 등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고문은 상당수 줄어들었으나 수사과정의 인권유린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고 비과학적인 감식에 의한 조작은 끊이지 않고 있다.

박종철 사건에서도 용기있는 의사들의 과학적인 감식이 없었다면 진상은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며, 소위 유서대필사건에서의 엉터리감정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이 하는 재판에 실수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판을 낳는 구조를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 작년의 김기웅 순경 사건은 현직 경찰관조차 조작수사의 희생이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더욱 감동적인 것은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인간성 회복이다. 이미 1989년에 <나의 왼발>(그 감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감독인 짐 세리단이었다)이라고 하는 인간승리의 감동으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받은 바 있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히피족에서 죄수로, 그리고 다시 투사로 변모하는 인간성의 성숙을 더욱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대시인의 아들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실제로 제리와 같이 며칠씩 잠도 안자고 금식을 하며 독방에서 살았다. 우리에게도 이런 배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더욱 압권인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다. 여기서 이상적인 아버지는 <돈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으나, 내면적으로는 강력한 정신력과 선량함을 지닌> 인간이다. 그는 불의에 끊임없이 맞서면서도 폭력을 거부하고 결국은 감옥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아일랜드식 가족주의는 한국과 같이 끈끈하기로 유명하나(그 부정적인 보기가 <대부>이다) 우리의 메마른 현대 자본주의사회에도 이런 감동적인 부자지간이란 것이 남아 있을까? 권력이나 돈으로 가족이기주의를 얽어매는 것이 우리의 가족주의, 부자관계는 아닐까? 그 황폐함으로 부모를 불사르는 만행이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아버지의 상이 우리의 가슴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진실을 통하여 감옥이라는 극단상황에서도 아들을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우리 아버지는 가지고 있을까?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으로> 다시 불의에 맞서는 새로운 세대를 우리는 교육하고 있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역사를 다시 창조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고 있을까? 그 아버지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평생을 값싼 노동으로 산 사람이었으나 정의와 자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에 홀로 맞섰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어떤가? 과연 아버지라는 이름에 걸맞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비록 아카데미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걸작이다. 같은 소재인 아일랜드공화군문제를 다룬 <크라잉게임>이 1992년 아카데미에서 6개부문의 후보가 되었으나 하나도 수상하지 못한 것과 같이 불운했다. <크라잉게임>의 감독은 1986년, <모나리자>로 명성을 얻은 닐 조단. <크라잉게임>은 극적인 상황전개와 절묘한 인물묘사로 세계를 놀라게 했으나 주제의식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미치지 못한다.

IRA과 관련된 실화를 영화로 만든 또 하나의 행형영화 걸작은 <어느 어머니의 아들Some Mother's Son>(1997년)이다. IRA 소속 청년들이 영국군에 총격을 가한 탓으로 구속되는데, 자신들은 전쟁 포로이므로 죄수복을 입지 않겠다며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 그 중의 하나인 제라드의 어머니(헬렌 미렌)는 폭력에 부정적이었으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한다. 감독 테리 조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의 각본을 쓴 사람이었다.  

케네디와 닉슨 사건

(1991년)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로서 공식 보고서인 워렌 보고서의 맹점을 지적한다. 감독은 주인공인 짐 개리슨 검사(케빈 코스트너)의 수사를 통해 국가와 이권단체들의 암투에 의해 대통령이 희생되었다고 사건 배후를 묘사한 것이 현실의 왜곡이라고 하여 물의를 빚었다.

영화는 케네디가 공산주의에 대해 온건한 입장이었고,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운 평화주의자였다고 그리면서 그의 암살 배후에는 거대한 군산(軍産)복합체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케네디 암살을 조사한 당시의 워렌 보고서는 이러한 음모설을 부정하고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영화가 상영되자 미국 언론은 영화가 지나친 흑백논리를 조립하기 위해 사실을 날조했다고 혹평했다. 존슨 부통령이 케네디 암살 직후 베트남에 관한 케네디의 명령을 바꿨다고 하는 영화 속 주장에 대해, 비판자들은 암살 4일 만에 존슨이 서명한 국가안전법안은 이미 케네디가 죽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하튼 사건의 진상을 알려줄 암살 관련 서류는 2009년까지 (특수한 경우는 2029년까지) 하원에 의해 비밀 보존하도록 되어 있다.

를 만들었던 올리버 스톤은 1995년,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닉슨Nixon>을 만들었다. 1972년 6월 17일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룬 이 영화는 법정 영화라기보다 정치 영화로서, 도청장치 설치로 인한 사건의 발생은 잘 다루었지만 특별검사로 임명된 콕스의 활약 등고 같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점들이 많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로는 알란 파큘러가 감독하고 더스틴 호프만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한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1976년)이 <닉슨> 보다 20년이나 먼저 제작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대통령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서 발생했다. 워터게이트 빌딩은 민주당 전국본부가 있는 곳으로서 5명의 절도범은 그곳에 들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훔치려고 했다. 언론으로부터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닉슨은 그 사건과 백악관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다.
선거가 본격화되면서 그 사건은 묻혀버렸으나 <워싱턴 포스트>의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는 끈질긴 추적 보도로 그 배후를 벗겨갔다. 그러나 닉슨은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고, 1973년 1월에 열린 재판에서 5명의 피고인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정치적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후 3월이 되어 피고인 중 한 사람이 청문회에서 진상을 폭로했다. 이어 특별 검사로 하버드 법대 교수인 콕스가 임명되었다.    

5월, 닉슨은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 사건과 그 은폐 기도에 백악관이 연루되었다는 점을 처음으로 시인하면서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증언이 계속 되면서 닉슨이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 집무실에 음성 녹음 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콕스는 대통령에게 그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닉슨은 임무 수행중의 대화는 대통령의 특권이므로 제출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에 연방 고등법원은 닉슨에게 제출을 명령했다. 대통령은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1974년 4월, 닉슨은 녹음 테이프의 기록을 언론에 공개했으나 하원은 테이프 자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닉슨으로서는 대법원의 면책특권 인정 판결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9명의 대법관 중 4명이 닉슨에 의해 지명되었고 대법원은 존슨 대통령 시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닉슨이 1968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당시의 대법원을 비판한 것이었다. 닉슨은 당시의 워렌 대법원장이 이끈 대법원이 다수 미국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흑인이나 학생운동권, 형사피의자들의 인권에 집착하여 사회적 안정을 해쳤다고 비난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법조인을 대법관으로 지면하겠다고 말했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직후, 20여년간 대법원을 진보적으로 이끈 워렌 대법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혀 보수적인 버거를 새로이 임명했다. 워렌 대법원장에 이어 윌리엄 더글러스, 휴고 블랙, 존 마샬 할란 등도 고령을 이유로 사퇴했다. 닉슨은 그 자리를 역시 보수적인 인사들로 채웠다. 따라서 닉슨으로서는 대법원이 자신을 지지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4년 7월, 대법원은 만장 일치로 대통령이 테이프를 제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면책특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충돌되면 사법부의 판단을 받아야 하고, 이 사안에서는 후자가 더욱 중요하고 특별검사가 수사에 필요해서 요청한 증거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필수적이므로 테이프가 제출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판결 후 하원은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승인했다. 마지막 절차인 상원의 인준이 있기 전 8월에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포드가 닉슨을 사면했다. 덕분에 닉슨은 처벌을 면했으나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력직을 사임한 자가 되었다.


* 민주법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6-07-1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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