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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관들의 사법 쿠데타


국순옥(인하대학교 명예교수)



헌법재판소의 발걸음이 미덥지 못하였던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칭 헌법 수호천사 헌법재판소가 빛바랜 가면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본디의 색깔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관습헌법이라는 정체불명의 허깨비를 불러들여 우리 성문헌법체계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은 반입헌주의적 헌법능욕, 한마디로 사법 쿠데타이다. 헌법재판소가 스스럼없이 총대를 메고 나선 이번 사법 쿠데타는 지난 초여름 탄핵정국을 몰고 온 의회 쿠데타의 자매편이다. 의회 쿠데타이든 사법 쿠데타이든, 그 한가운데에는 시대와 호흡을 함께 하기에는 숨 길이가 턱없이 모자라는 수구반동 기득권집단의 초조감과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해석기관이다. 헌법재판소의 헌법해석이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최소한의 권위를 지녀야 한다. 헌법재판소 결정의 권위는 총구에서 나오는 것도 여론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헌법해석의 논리적 설득력이야말로 권위의 유일한 샘이다. 그러나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은 법 상식의 테두리를 한참 벗어난 일종의 정치적 비토 선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위헌 결정을 주도한 다수의견 어느 구석을 들추어 보아도 논리적 설득력을 갖추기 위한 진지한 고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논리는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이 되고, 예단 몰상식 그리고 억지가 서로 밀거니 당기거니 어지럽게 춤추고 있을 뿐이다.  

예단은 법조인들이 경계해야 할 금기사항들 가운데 으뜸가는 항목이다. 우리 헌법이 법관 양심 조항을 특별히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위헌 결정에 손을 빌려준 헌법재판관들의 다수의견은 신행정수도 건설 불가라는 정치적 예단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이같은 정치적 예단은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이 합리적 논리도 제시하지 않고 행정수도 건설을 수도 이전으로 못 박고, 수도 이전을 다시 ‘기본적 헌법사항’으로 부풀리는 논리 비약의 독단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논리 비약의 독단은 그러나 결코 우연히 아니다. 그것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빈곤과 헌법학적 인식 지평의 천박성에서 비롯한다. 한 나라의 수도는 말할 것도 없이 다목적 기능복합체이다. 정치적 그리고 행정적 기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기능과 문화적 기능이다. 수도 기능의 이같은 분화와 이에 따른 기능 체계 조정은 사회발전의 결정적 지표이다. 수도 기능 가운데 행정적 기능만 떼 내어 지리적 공간을 재배치하는 것은 수도 기능의 합리적 축감일 뿐, 수도 기능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의 빈곤보다 더 큰 문제는 헌법학적 인식 지평의 천박성이다. 수도 소재지 문제는 기본적으로 법률사항이다. 물론 수도 소재지를 헌법이 명문으로 규정하는 예외적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나 이번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다수의견이 주장하는 것처럼 ‘기본적 헌법사항’이기 때문이 아니다. 헌법 제정 또는 개정 당시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오는 일종의 불가피한 입법 기술적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몰상식의 극치는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의 복고주의적 정신구조이다. 찬반의 입장 차이를 떠나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은 지리적 공간 재배치를 통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실현하려는 우리 사회의 미래 청사진이다. 때문에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인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에 대하여는 정작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경국대전을 생게망게 들고 나와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이 한가롭게 나눈 독백 형식의 선문답은 더욱 충격적이다. 대한민국은 조선왕조의 법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선왕조 후계 국가가 아니다. 하물며 헌법재판소가 조선왕조 도읍지 한양을 연구하기 위하여 모인 풋내기 역사가 동호회는 더더욱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설치된, 대한민국 헌법을 심판기준으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해석기관이다.

이번 헌법소원심판 사건은 여느 심판사건과 달리 역사적 무게가 막중하다. 그만큼 헌법재판소는 없는 지혜나마 총동원하여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그러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위헌 결정에 가담한 헌법재판관들의 다수의견은 헌법재판소가 결정의 이름으로 국민 앞에 내놓기도 부끄러울 만큼 논리 구성이 치졸하기 짝이 없다. 논리적 설득력은 고사하고 억지의 경연장이라 할만치 모순과 배리 투성이다. 다수의견에 따르면, 수도 문제는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임과 동시에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이다. 다수의견의 주장처럼 수도 문제가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이라면 그리고 나아가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이라면, 이들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과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은 반드시 성문헌법에 규정하는 것이 입헌주의의 기본상식이 아닐까? 이른바 관습의 테두리 안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라면, “국가생활에 관한 국민의 근본적 결단”일 수도 “국가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핵심적 헌법사항”일 수도 없다는 것 역시 입헌주의의 기본상식이 아닐까? 그렇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은 이제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떳떳하게 대답해야 한다. 스스로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 자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이념적 좌표가 입헌주의인지, 아니면 반입헌주의인지 정치적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조차도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수도 있다. 헤겔의 말마따나 세상에는 역사의 간지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인형처럼 갖고 노는 꼭두각시들은 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계몽적 차원에서 몇 마디 사족을 붙이는 것도 결코 부질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주지하는 대로 입헌주의의 핵심은 헌법의 성문화이다. 입헌주의의 사전에는 관습헌법이라는 말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입헌주의 아래에서 관습헌법론이 고개를 든다면, 거기에는 필시 나름의 곡절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경우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은 출범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관계 때문에 헌법 제정을 후일의 과제로 미루고 단지 정부조직 관련 법률 서너 개로 70여년을 버티었다. 성문헌법을 대신하여 관습헌법이 터 잡을 입헌주의적 공간이 자연스럽게 열린 셈이다. 이같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를 제외한다면, 관습헌법론은 대부분의 경우 입헌주의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원용되었다. 나치스 체제 아래에서 형사법학자들이 관습형법론을 들고 나와 나치스 형법이론의 구축에 앞장 선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헌법학 부문도 마찬가지이다. 바이마르 헌법체제 아래에서 관습헌법론을 반입헌주의적 헌법이론 구축의 전초기지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스멘트이다. 스멘트의 통합이론은 본질적으로 반입헌주의적이다. 그것은 독일 최초의 자유주의적 입헌주의 헌법체제인 바이마르 헌법체제를 부정하기 위한 반혁명 헌법이론이다. 스멘트의 통합이론이 지향하는 헌법체제는 비스마르크 아래의 입헌군주주의 헌법체제이다. 따라서 스멘트의 통합이론은 성문헌법보다 관습헌법에 더 무게를 둔다. 스멘트 통합이론의 이같은 반입헌주의적 속성 때문에 스멘트의 통합이론이 무솔리니 체제 아래의 이탈리아 파시즘 헌법이론에 일정한 영향을 준 역사적 사실도 다시 한번 곱씹을 대목이다. 아무튼 계몽의 여정을 이쯤에서 접어도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이 걸어온 길이 어디로 가는지가 어렴풋이나마 드러난다. 내친김에 다수의견 헌법재판관들과 함께 몇 걸음을 더 가면, 우리는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진 스멘트의 묘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관습헌법은 정신 합법칙성의 소산이다. 따라서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에 우선한다.

사법 쿠데타의 희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막간극의 주인공은 다수의견에 동조하며 일부 반대의견을 낸 헌법재판관이다. 그는 이번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졸지에 루소 류의 민중주의적 인민주권론자로 탈바꿈하여 민중주의적 인민주권론조차도 감히 상상하기 힘든 급진 민주주의적 기본권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외교 국방 통일 등 국가안위에 관한 주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게 한 우리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의 정치적 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한 임의규정이다. 이같은 임의규정에서 국민투표권을 직접 도출하는 것은 기본권이론의 입장에서 볼 때 법 사고의 파탄이나 다름없는 상식 이하의 허튼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같은 견강부회는 헌법재판소가 지금까지 견지하여온 국민주권 관념이나 민주주의 이해와도 크게 어긋난다. 헌법 비틀기도 이 정도가 되면 도가 너무 지나치다. 좋게 말하여 혁명적 발상이라 할까, 앞으로도 초지일관할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헌법재판소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치명적인 자충수이다. 마지막의 시작이다.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다. 이제 정치에 입맛을 들인 헌법재판관들의 무책임한 헌법해석 놀이에 마침표를 찍을 때이다. 우선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헌법재판관들의 사법 쿠데타로부터 입헌주의 전통을 살려내고, 그 위에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국가 원수로서 헌법재판관들의 사법쿠데타로부터 헌법을 수호할 막중한 임무를 떠맡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관계없이 대통령은 신행정수도건설특별조치법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실히 집행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아들여 그 테두리 안에서 대체 입법을 강구하려는 정부 일각의 패배주의에 대통령이 굴복하면, 입헌주의도 민주주의도 끝장이다. 대체 입법에 골몰할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헌법재판제도를 국민주권의 테두리 안에 묶어놓기 위한 헌법재판소법 개정 작업을 하루 속히 서둘러야 한다.




2004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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